[산업일보]
정주영|1915.11.25~2011.03.21
“무슨 일이든 간에 된다는 확신 90%와 반드시 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 10%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 다 된다. 나는 ‘안 된다’는 식의 생각을 단 1%도 해본 적이 없다”
이병철|1910.02.12~1987.11.19
“의심을 하면서 사람을 부리면 그 사람의 장점을 살릴 수가 없다. 그리고 고용된 사람도 결코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일단 채용했으면 대담하게 일을 맡겨라”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 없이 맞이했을 경쟁, 그 경쟁을 통해 인간은 진화한다. 그리고 경쟁에는 늘 라이벌이 있기 마련이다. 여기 피할 수 없는 인생의 라이벌이 된 두 사람이 있다. 오늘날 삼성과 현대를 세운 두 인물, 그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거침없는 도전정신을 보여준 정주영과 치밀한 분석력과 냉철한 판단력을 지닌 이병철이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삼성과 현대를 글로벌 기업으로 이끈 리더이자 한국경제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의 삶을 재조명한다.
지독한 가난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감행한 몇 번의 가출, 정주영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의 싸움이었다. 배움 역시 그에게는 사치였기 때문에 그의 학력은 송전소학교 졸업이 전부였다. 치열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정주영과는 달리 이병철은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대구 삼성상회중동중학을 졸업한 뒤 일본 와세다 대학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할 정도로 집안 형편이 넉넉했으며 배움에 대해서도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정주영은 배움의 끈은 짧았지만 열정만큼은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다. 기업 경영자로서의 꿈을 키우게 된 것은 1938년 23세 때, 배달원으로 일하던 복흥상회 쌀가게의 주인이 되면서 부터다. 같은 해 이병철 역시 사업을 시작한다. 대구에 삼성상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3만 원의 자본금으로 경영자로서 첫 발을 내딛었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의 격변기 속에서도 그들은 자기만의 경영이념을 고수하며 좌절과 도전의 경영자 길을 걷기 시작한다.
정주영의 경영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중일전쟁으로 쌀 배급제가 시행되면서 2년 만에 복흥상회를 정리했으며, 1941년 빚을 내 아도서비스 자동차 수리공장 사업을 시작했으나 1달 만에 불타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후 다시 빛을 내 신설동에 자동차 수리공장을 세웠으나 이마저 기업정리령에 의해 빼앗기고 만다. 그러나 정주영은 포기하지 않고 멈출 줄 모르는 도전정신으로 또 다시 회사를 꾸린다. 미군정청의 산하기관인 신한공사에서 초동의 땅 200여 평을 불하받아 현대 그룹의 모체가 될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한 것이다.
그도 얼마 지나지 않아 불행은 또 어김없이 찾아왔다. 6.25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된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정주영은 피난을 떠난 부산에서 또 다시 토목사업을 시작하며 재기의 발판을 다진다. 정주영의 건설회사는 1965년 국내 최초로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을 성공시키며, 국내 건설업계의 선봉에 섰다. 이어 2년 뒤 53세의 나이에 6.25 전쟁으로 잃었던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재설립하기에 이른다. 그의 불굴의 도전정신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정주영은 1970년 고리 원자력발전소 1호기를 착공, 2년 뒤에는 현대조선소를 기공하고, 현대조선중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해 사업 확장과 함께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현대 조선 설립 당시 홀로 영국 버클레이 은행장을 찾아가 500원짜리 지폐에 꺼내 들고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 사진을 보여주며 한국이 옛날부터 조선업 강국이었음을 설명하고 차관 도입을 유치해 낸 일화는 유명하다. 그가 죽은 뒤에도 CF로 만들어지며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정주영에 반해 이병철의 경영은 비교적 순탄한 길이었다. 삼성상회 창설 후 1942년 조선양조를 인수하게 된 그는 6.25전쟁이 났을 당시에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설립해 사업을 확장했다. 1951년 부산에 삼성물산을 만들고 본격적으로 무역사업에 착수했으며, 1953년 제일제당주식회사 설립을 시작으로 당시 우위를 점하고 있던 상업자본에서 탈피해 제조업으로 과감히 눈을 돌려 큰 성공을 거두기 시작한다. 여세를 몰아 1969년 삼성전자를 설립, 삼성그룹의 토대를 마련하면서 1982년 그의 나이 73세 때 130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 손해를 감수하고 반도체 사업에 뛰어 들어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키기에 이른다.
성공과 함께 사업 확장에 돌입한 두 사람은 경쟁자로서 운명적 만남과 조우한다. 경공업에 힘을 쏟던 삼성이 돌연 건설, 기계, 조선 분야로 까지 사업 영토를 확장, 이미 조선, 자동차, 기계 분야에서 국내 1위를 달리고 있던 현대와 접전하게 된 것이다. 삼성이 중공업에 발을 들여 놓자 제2제철과 원자력 발전소등 초대형 프로젝트에서 두 그룹의 불꽃 튀는 대결이 펼쳐졌다. 또한 전자산업에 있어서도 두 그룹의 자존심을 건 싸움이 이어졌다. 삼성이 미국 ITT와 반도체기술 도입을 계약하자 현대는 아예 실리콘벨리에 직접 공장을 설립하겠다는 사업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최고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공방전을 펼친 두 사람의 대결은 언론에 의해 역전의 재역전을 거듭하는 농구시합에 비유되기도 했다.
정주영에게 불굴의 ‘도전정신’이 있었다면 이병철에게는 미래를 내다보는 ‘남다른 혜안’이 있었다. 온갖 시련과 좌절을 겪어 왔던 정주영에게 실패를 모르는 ‘자신감’이 있었다면, 이병철에게는 회사를 이끌어가고 기업의 뿌리가 될 ‘인재’들이 있었다. 또한 정주영에게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는 ‘배포’가 있었다면 이병철에게는 목숨처럼 지켜온 ‘품질과 신용’이 있었다. 이렇듯 한국 경제 성장의 주역인 두 사람은 너무나 다른 경영 이념과 경영 방식을 펼쳤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두 사람에게도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남다른 추진력이었다. ‘된다, 옳다’고 확신하는 일에는 두 사람 모두 주저함이 없었다. 다만 그 방식에 있어서 정주영은 행동으로 보여주는 경영을, 이병철은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는 경영을 펼쳤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회사 경영을 고수하던 두 사람. 오롯이 경영에만 몰두하던 이병철과 달리, 정주영은 사업을 넘어 정계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정주영은 낙선의 고배를 마신다. 1998년부터 정부의 대북 포용 정책에 발맞춰 금강산 개발 사업을 적극 추진하며, 한국의 평화와 성장을 위해 노력하던 정주영은 2001년 3월 21일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이병철은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만든 장본인으로서 금탑산업훈장을 비롯한 세계최고경영인상의 영예를 안았다. 위암 투병 중에도 사업에서 손을 놓지 않고 삼성을 세계적 기업의 반열에 올려놓는 열정을 보였으며, 1987년 11월 19일 폐암으로 생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