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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공단 여성노동자의 쪽방 삶, 어땠을까
김대은 기자|kde125@kid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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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공단 여성노동자의 쪽방 삶, 어땠을까

산업화의 그늘 비추고, 현재와 연결하는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 체험기

기사입력 2025-07-17 10:4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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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공단 여성노동자의 쪽방 삶, 어땠을까
‘금천 순이의 집,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 전경
[산업일보]
1호선 가산디지털단지역 2번 출구를 나와 건널목을 건너 왼편으로 1분 정도 걷는다. CU 편의점을 지나 오른쪽 골목 안으로 2분가량 들어가면, 다세대주택 사이 2층 주택이 눈에 들어온다. 주택 외관을 감싸고 있는 철망 위에는 ‘금천 순이의 집,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이라는 간판이 설치돼있다. 옛 구로공단의 역사와 노동자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는 근현대사 체험관이다.

매해 7월은 고용노동부가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지정하는 ‘산업안전보건의 달’이다. 본지에서는 산업안전보건의 달을 맞아, 한국 산업화 시기 여성노동자들의 작업환경과 생활상을 돌아볼 수 있는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이하 체험관)을 찾았다.

체험관은 서울특별시 구로구와 금천구에 조성된 ‘서울디지털국가산업단지(이하 디지털단지)’ 인근에 위치해 있다. ‘G밸리’라고도 불리는 디지털단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산업단지인 구로공단(한국수출산업공단)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구로공단은 1964년 제정된 ‘수출산업단지개발조성법’에 따라 현재의 구로구 구로동과 금천구 가산동 일대에 1965년부터 1973년까지 3개 단지로 조성됐다.

봉제, 조립 등 노동집약적 제조업을 기반으로 성장한 구로공단은 국내 총수출액의 10%를 차지하며 1970년대 대한민국 고도성장을 이끄는 중심축이 됐다.

구로공단에는 15~16세 전후의 여성노동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었다. 이들은 가족의 생활비와 남자 형제의 학비를 책임지기 위해 노동 현장에 뛰어들었다.
구로공단 여성노동자의 쪽방 삶, 어땠을까
6개의 쪽방체험관이 마련된 복도

그러나, ‘여공’, ‘공순이’라고 낮잡아 불리던 여성노동자들의 생활상은 열악했다. 체험관 지하에는 당시 노동자들의 생활공간인 ‘쪽방’이 재현돼 있다. 6.6~9.9㎡(2~3평) 남짓의 쪽방 6개가 생활방, 봉제방, 공부방 등의 테마로 구성돼 있다. 쪽방은 다닥다닥 붙어있다고 해서 ‘벌집’이라고도 했다.

체험관을 운영 중인 금천구청 관계자는 “체험관을 방문한 실제 여성노동자들은 ‘그때에 비하면 호텔 수준’이라고 말한다”라고 전했다. 관람객의 체험이 이뤄지는 만큼, 실제보다 조금 크게 재현됐다고도 덧붙였다.
구로공단 여성노동자의 쪽방 삶, 어땠을까
쪽방체험관 전경

여성노동자들은 이보다 좁은 방 하나에 5~6명이 모여 살았다. 구로공단의 근무 형태가 하루 12시간 2~3교대 근무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방 옆에는 자그마한 간이 부엌이 있었지만, 수도는 공급되지 않았다. 그래서 세면장,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해야 했다.
구로공단 여성노동자의 쪽방 삶, 어땠을까
공동세면장을 이용하는 여성노동자를 재현한 모습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났는데도 단 두 개밖에 없는 공용화장실에는 벌써 긴 줄이 들어섰다. (중략) 화장실 가는 것을 포기하고 일단 공동세면장으로 발길을 돌린다. 세면장도 벌써부터 북적이고 있다. 각자 자신들의 부엌에서 연탄아궁이에 데운 물을 들고나와 5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부리나케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해낸다.
이 작은 2층 양옥에도 서른일곱개 나 되는 방이 있는데 (중략) 잔업과 야근, 야학으로 시간에 쫓겨 지내다 보니 이 방은 겨우 몇 시간 잠을 청하기 위해 오는 곳 일뿐이다. 때문에 이 집에 얽힌 별다른 추억거리 하나 없다.

체험관은 구로공단에서 근무했던 소설가 신경숙의 ‘외딴방’ 중 일부를 인용해, 쪽방에서의 생활상을 이같이 소개하고 있다.
구로공단 여성노동자의 쪽방 삶, 어땠을까
미니어처로 재현된 당시 쪽방 풍경

쪽방의 월세도 만만치 않았다. 금천구청 관계자는 “지금의 강남보다 당시 가산동의 집값이 더 비쌌다는 얘기도 있다”라고 말했다. 여성노동자 대부분이 지방에서 상경해 지낼 곳이 필요한데, 공장 기숙사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성노동자들의 월급이 3~6만 원 사이였는데, 쪽방 월세가 4~5만 원이라고 전해진다”라며 “혼자 감당이 어려우니, 여러 명이 돈을 나눠 내기 위해 모여 살게 된 것”이라고 했다. 이런 쪽방조차 세 들기 어려운 환경의 여성노동자는 인근의 수녀원으로 향하거나, 안양천을 건너 경기도 광명시 하안동에서 출·퇴근했다.

“여름에 에어컨은 물론 선풍기도 틀지 못했습니다. (중략) 2시간만 일하면 온몸이 젖고, 실 먼지로 뒤덮였습니다”
“12살, 13살 시다(보조)들이 많이 있었는데, 아이론 프레스(대형 다리미)를 다뤘습니다. (중략) 잠깐만 졸면 손을 넣었다가 빼지 못해 손이 오징어처럼 눌리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1983~1985년 구로공단 대우어페럴에서 미싱사로 일했던 심상정 전 국회의원의 일화도 체험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심 전 의원은 1985년 6월 ‘구로동맹파업’을 주도했다.
구로공단 여성노동자의 쪽방 삶, 어땠을까
노사분규 자료사진(위)과 옛 대우어페럴 공장 위치를 알리는 표지판(아래)

그의 일화에서 엿볼 수 있듯, 여성노동자들은 열악한 생활수준 개선은 고사하고 산업재해와 질병으로부터도 보호받을 수 없었다. 도시산업선교회의 노동자권리·인권 교육, 대학생들의 위장취업, 노동야학을 통해 그들은 자신의 처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고, 노동자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각종 노동 운동을 전개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구로공단은 전환점을 맞았다. 섬유·조립·금속업체들이 한국보다 임금이 저렴한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등 해외로 대거 이전했다. 정부와 서울시는 디지털단지로 명칭을 변경했고, 이미지 쇄신을 꾀했다.
구로공단 여성노동자의 쪽방 삶, 어땠을까
지식산업센터 ‘가산퍼블릭’ 전경

디지털단지는 IT 지식산업 중심지로 거듭났다. 2024년 9월 기준 약 14만 명의 청년층이 일하고 있다. 제조공장이 있던 부지는 163개의 지식산업센터로 탈바꿈됐다. 이름과 업종은 바뀌었지만, 이곳은 여전히 한국의 역동적인 산업단지로 자리 잡고 있다.

구로공단 노동자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구 관계자에게 과거 노동자의 삶을 조명하고 있는 이유를 묻자, “구로공단 여성노동자들은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끌었다”라며 “그들의 삶과 기억을 보존하고 다음 세대와 연결하는 것이 이 체험관의 역할”이라고 답했다.
구로공단 여성노동자의 쪽방 삶, 어땠을까
과거 전자공장·물류센터로 사용되던 건물(위)과 수출의 다리(아래)

디지털단지에는 아직 구로공단 시절의 흔적이 남아있다. 체험관 인근에만 해도 과거 전자공장이자 물류센터로 사용되던 건물이 유지되고 있다. 1970년 구로공단 제조품 수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개통된 ‘수출의 다리’는 경부선 선로를 넘나들 수 있는 고가차도로써 역할을 다하고 있다.
구로공단 여성노동자의 쪽방 삶, 어땠을까
전시를 위해 서울역사박물관이 제공한 쪽방(벌집)촌 자료사진

한편, 쪽방에서 생활하는 노동자들도 존재하고 있다. 구 관계자는 “체험관은 쪽방을 재현한 공간이지만, 이 주변에는 현재도 쪽방이 남아있고 주로 외국인 노동자와 중국인 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다”라며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을 늘 강조한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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