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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라이벌]_케네디 VS 닉슨
나미진 기자|mijindami@kid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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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라이벌]_케네디 VS 닉슨

기사입력 2012-01-26 00: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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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라이벌]_케네디 VS 닉슨


[산업일보]
John Fitzgerald Kennedy|1917.05.29~1963.11.22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라”

[불멸의 라이벌]_케네디 VS 닉슨


Richard Milhous Nixon|1913.01.09~1994.04.22
어떤 일에 실패했다고 그 사람의 인생 자체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일을 중도에서 포기하면 바로 그때 인생 자체가 끝난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 없이 맞이했을 경쟁, 그 경쟁을 통해 인간은 진화한다. 그리고 경쟁에는 늘 라이벌이 있기 마련이다. 여기 피할 수 없는 인생의 라이벌이 된 두 사람이 있다.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이미지 메이킹을 통해 자신의 목표를 이룬 케네디와 패배 이후 포기하기 않고 39대 대통령이 된 닉슨. 두 사람은 대통령이라는 똑같은 목표와 야망을 가진, 운명이 정해준 라이벌이었다.

1960년 9월 26일.

미국 3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후보인 존 에프 케네디 상원의원과 공화당 후보인 닉슨 부통령의 TV토론회가 벌어졌다.
당시 최초로 펼쳐진 이 대토론회는 케네디와 닉슨의 운명을 뒤바꿔 놓았다. 총 4에 걸쳐 열린 토론회는 매회 다른 주제로 진행됐으며, 미국 전 지역에 생중계됐다.

흑백 TV 속의 케네디는 늘 활기찬 모습으로 국민과 대화하듯 말하며 적극적으로 토론에 임했다. 이는 곧 ‘젊은 대통령’이라는 긍정적 이미지를 시청자들의 마음속에 각인시켜 나갔다. 반면 TV 속 닉슨은 이와 대조적인 모습으로 비춰졌다. 굳은 표정과 피곤함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점차 시청자들 마음 속에 닉슨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싹트기 시작한다.

TV토론회를 시청한 7,000만 명 중 57% 이상이 토론회가 끝난 후 누구를 투표할 것인가를 결정했다고 하니, 토론회의 영향력은 실로 막강한 것이었다. 결국 토론회의 여파로 당시 정치적 경험도 부족했고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케네디가 ‘정치스타’로 떠오르기에 이른다. 이는 실제 대선에서도 효력을 발휘해 케네디는 닉슨과 4,673표 차이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닉슨의 풍부한 정치 경험과 논리는 라디오 청취자들을 사로잡았지만, 당시 대세였던 TV의 위력을 무시하고, 시대의 흐름을 간파하지 못 했던 닉슨의 패배였다.

이 두 사람의 인생은 어떠했을까? 두 사람은 탄생부터 극과 극을 달렸다.
1913년 캘리포니아 주에서 탄생한 닉슨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다. 타고난 성실함과 명석한 머리로 하버드대에 합격했지만 돈이 없어 집 근처 휘티어대에 입학할 정도로 그의 생활은 넉넉지 못했다. 하지만 변변치 못한 형편에도 성실함과 부지런함을 무기로 힘든 시간을 극복해낸다. ‘무쇠머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며칠 밤을 세며 공부하기가 일수였으며 목표한 것을 이루기 위해 언제나 열정을 다했다.

1917년 메사추세츠 주에서 태어난 케네디는 성공한 아버지 덕에 부유한 가정에서 유복하게 자라난다. 컨버터블 자동차를 타고 유럽여행을 할 정도로 부자들의 삶을 만끽했던 그는 상류층 자제들의 행보가 그렇듯 엘리트 코스를 밟고 하버드대에 입학했다.

1946년, 두 사람의 정치 입문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정치에 뜻을 품고 두 사람 모두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다. 닉슨은 공화당에 입당해 ‘반공 투사’로 우파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며 차츰 명성을 얻어갔고, 케네디는 좌파인 민주당을 지지하며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를 등에 업고 조용한 정치 행보를 이어갔다.

1950년 닉슨은 케네디보다 먼저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 2년 후에는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로 부대통령 후보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성실함과 총명함으로 무장한 그가 정치계에서 두각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같은 해 케네디 역시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된다. 그러나 정치계에서 그의 활동은 미비했으며, 오히려 타임지의 표지모델이나 자신의 전쟁 무용담을 시리즈로 제작해 TV에 방영하는 등 내실을 채우기보단 보여주기 위한 정치를 하는 것처럼 비춰졌다. 훗날 있을 대선을 성공으로 이끈 비결은 모두 이때의 정치 행보와 맞닿아 있다.

1960년 닉슨은 부대통령의 재선을 통해 쌓은 풍부한 정치 경력을 앞세우며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고, 케네디 역시 ‘가장 잘생긴 대선 후보’라는 타이틀을 내세우며 화려한 말솜씨로 유세 활동을 시작한다. 운명이 맺어준 라이벌의 숙명과 맞닥뜨린 순간이다.

1963년 11월 22일.

미국 35대 대통령에 당선된 케네디는 댈러스에서 지붕 없는 차를 타고 카 퍼레이드를 하던 중 암살됐다. 그가 대통령이 된 지 2년 10개월만의 일이다. 결국 자신이 만들고자 했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다 펼쳐 보지도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모락모락 피어나는 온갖 추측과 음모론들은 현재도 끊임없이 회자되며 논란의 중심에 있다.

케네디가 죽은 지 5년 후 케네디와의 대선에서 패배 후 정계 은퇴를 생각할 정도로 낙담했던 닉슨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다시금 도전의 불씨를 당긴다. 결국 험프리를 누르고 37대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쾌거를 이뤘다. 대통령이 되자 자신의 역량을 맘껏 펼쳐 나간다. ‘닉슨 독트린(1969년)’을 발표, 미국의 공격적인 세계전략을 포기하고 세계질서를 위한 화해와 협력 분위기를 조성했다. 또한 중국과 친선 탁구시합을 기회로 관계개선을 모색하는 ‘핑퐁외교(1971년)’를 벌이고 북경과 수교를 맺음으로써 동서 데탕드를 본격화했다.(1972년) 또한 베트남 파리협정을 통해 베트남 전쟁을 종식시켰다. 역사에 남을 만한 정치적 성과를 거두며 닉슨은 1973년 재선에도 성공한다.

하지만 재선을 준비하던 중 ‘워터게이트 사건(워싱턴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 위원회 본부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된 사건)’이 터지자, 닉슨의 불법도청 행각과 거액 탈세 비리가 만천하에 공개되면서 대통령직을 사임, 정치계에서 물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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