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과학기술은 위대한 철학과 신념에서 나온다. 김우식 경희대학교 화학공학과 교수와 얘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든다. 김 교수는 테일러 와류를 이용한 고효율 결정화기기를 개발한 주인공이다. 테일러 와류는 무엇이며 어떻게 결정화기의 효율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 들어봤다.
“국내 과학기술 분야의 최고의 상을 수상하게 돼 영광입니다. 어려운 여건에도 많은 연구자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연구개발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대신해 수상하니 더욱 연구에 매진해야 하는 책임감을 느낍니다”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청년이 독창적인 결정화 기술개발의 꿈을 안고 연구개발에 몰두한 지 25년.
어느새 머리는 희끗희끗해졌지만 첨단 정밀화학 제품과 의약품 생산의 기반이 될 고효율 결정화기를 세상에 내놓았다. 주인공은 경희대학교 화학공학과 김우식 교수.
아스피린이나 탄산칼슘 등에서 보듯 결정구조의 소재는 제약이나 의약, 정밀화학, 에너지 산업 등 고부가가치 산업분야에서 두루 이용되는 감초다.
이러한 결정소재의 성능은 결정의 구조와 형상에 좌우되기 때문에 결정화 공정은 정밀화학과 제약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김 교수는 편서풍의 원리로도 알려진 테일러 와류를 이용해 고효율 결정화기를 설계하고 이를 이용해 결정화 공정의 효율을 높일 수 있는 연구성과로 주목받고 있다.
첫 공학적 응용
테일러 와류는 직경이 다른 두 동심원 원통 사이에서 유도되는 불안정 유동(unstable flow)으로 원통회전 속도가 얼마 이상으로 증가할 때 생기는 서로 반대방향으로 회전하는 두 개의 고리 형태의 규칙적인 와류를 말한다.
기존 불규칙한 난류 유동을 이용하는 방식은 결정화 효율에 한계가 있었다. 이에 김 교수는 내부 원통을 회전시켜 테일러 와류를 유도하고 이 와류가 용액 내 분자배열과 물질전달을 촉진하는 현상을 이용하는 새로운 방식의 결정화기를 설계했다.
결정화기는 제약, 정밀화학, 석유화학, 소재산업 등에서 고부가가치 결정물질을 제조하는데 필요하다. 예를 들면, MSG, 제약 같은 성분은 미생물 발효 또는 화학반응을 통해 용액에서 합성되는데 이것을 시중에 판매하는 결정 분말 형태로 순수하게 정제하기 위해서는 결정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김 교수는 “이 결정화 과정에 테일러 와류라는 특이한 유체의 움직임을 적용해 기존 기술에 결정생산성을 수십~수백 배로 높였다. 테일러 와류란 마치 커피 잔을 스푼으로 저을 때 일어나는 큰 소용돌이 모양의 유체 움직임 같은 것이다. 소용돌이를 작고, 균일하고 규칙적으로 만들어주면 결정화 과정이 촉진되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이용해 결정화기를 개발한 것인데 이 기술을 적용할 경우 기존 수만 리터 용량의 결정화기를 수십 또는 수백 리터로 축소가 가능하며 공정 에너지도 대폭 감소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높은 결정화 효율로 기존 대규모 결정화 공정을 소형화해 대량생산 방식뿐 아니라 정밀화학, 제약과 같은 다품종 소량생산 방식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위대한 과학은 위대한 철학과 신념에서
“평소 아폴리네르 기욤이라는 프랑스 시인의‘그리해 그들은 날았다’라는 시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 실패라는 절벽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실패의 두려움을 넘어서는 것이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과학기술자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개발된 결정화 기술은 회분식 뿐만 아니라 연속식 공정에서도 높은 생산성을 보인다. 김 교수는 “기존 결정화 공정은 대부분 일정량씩 나누어 처리하는 회분식 방법에 의존했기 때문에 수작업으로 반응물을 주입하고 합성을 관찰하고 생성물을 빼내야 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연속식 공정 및 결정화기가 개발됐지만 이런 연속식 기술 역시 균일하게 품질이 높은 결정을 제조하는 공정에 적용하기에는 약점이 있었다”고 피력했다.
대부분의 정밀화학, 제약, 소재 산업에서 신약, OLED, 에너지 저장 소재를 제조할 때 회분식 공정을 적용하고 있어 공정에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생산성이 낮다는 한계가 있었던 것. 하지만 새로운 기술을 적용할 경우 낮은 공정 에너지로 고품질의 제품을 보다 많이 생산할 수 있어 관련 제품의 고부가가치화는 물론 국제시장에서의 품질 및 가격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내 결정화 연구에 초석을 마련하다
김 교수는 1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시작한 결정화 연구를 1994년 경희대에 부임해서도 계속 이어 나갔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 결정화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연구자는 없었다. 김 교수는 “전달현상의 전문가인 서울대 최창균 교수와 테일러 와류의 재미난 유동특성을 이야기하던 중 이를 결정화기술에 적용해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으니 벌써 20년간 결정화에 매달린 셈”이라고 말했다.
그러던 중 더 좋은 기회가 김 교수에게 찾아 왔다. 2007년부터 정부 연구비를 받아 에너지 효율 향상 과제를 수행하게 됐다. 이를 통해 테일러 와류가 결정화 공정의 생산성 및 에너지 효율을 높인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테일러 와류만의 독특한 효과를 다양한 결정화 물질에 적용하는 연구를 수행 중이다.
김 교수는 “현재 이 기술을 배터리 전극재료 및 제약물질 다형체 제조에 적용하는 연구를 수행 중으로 앞으로 보다 다양한 소재 및 다형체 설계가 가능한 결정화 공정을 개발하고 산업에 적용하는 연구를 추진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향후 바이오매스를 원료로 여러 제품을 생산하는 바이오리파이너리에도 적용할 계획이다. 나아가 제약 및 정밀화학 분야에서의 광학이성질체 분리 정제 기술개발에도 적용할 것으로 보인다.
“평범한 연구자다. 실패의 두려움 보다는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잃는 것을 더 두려워 한다”는 그의 신념 속에서 우리 과학기술의 미래를 기대해 본다.
한편 미래창조과학부와 한국연구재단은 첨단 정밀화학 제품과 의약품 생산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신개념의 고효율 결정화기와 공정을 개발한 공로로 경희대학교 화학공학과의 김우식 교수를 11월 과학기술자상 수상자로 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