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에서 감자를 캐며 인간을 진료하는 한의사가 있다. 도시의 진료실과 시골 밭을 오가는 독특한 생활, 이른바 ‘반농반의(半農半醫)’를 실천하는 김경택 원장이 첫 인문 에세이 '보리밭에서 감자를 캐다'(시간의물레 刊)를 출간했다.
책은 일종의 생활기록이면서도 사유의 단면들을 조용히 누벼간다. “얼굴 주름은 깊어지되 의식은 처지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보이듯, 그는 자연에서 나이 드는 법을 배우고 있다. 사시사철 변하는 숲의 얼굴,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구상나무, 벌레 먹은 감자마저도 포용하는 텃밭의 태도 속에서 그는 인간의 병과 노화, 고독과 재생을 들여다본다.
한의학 박사로서의 지식과 농학도로서의 체험은 이 책을 특별하게 만든다. 저자는 원광대 한의과대학과 경희대 대학원을 거쳐 한의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고, 다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농학을 공부해 ‘유기농업기사’ 자격을 취득했다. 이력만 보면 마치 두 개의 전공을 병행한 학제간 연구자 같지만, 그는 오히려 “글쓰기는 진료의 연장이고, 농사는 공부의 실천”이라 말한다. 한의학도, 농학도, 그리고 문학도 결국 ‘삶을 어떻게 건강하게 이해하고, 사람을 어떻게 따뜻하게 볼 것인가’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책 속에는 도시인의 로망이라 불리는 ‘5도 2촌’ 삶의 실제가 생생히 담겼다. 자연에서 깨달은 시간의 감각, 흙의 온도, 사물의 소리들이 그저 유려한 수사가 아니라 구체적인 통증의 기록처럼 다가온다. “토양의 오염은 인간의 황폐화다”라고 그는 단언한다. 텃밭을 가꾸는 일이 곧 인간성을 복원하는 일이고, 흙을 살피는 눈이 곧 타인을 살피는 감각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에서다.
이 책은 단순한 귀농기나 건강에세이를 넘어선다. AI와 기후위기의 시대, 인간이 어떻게 인간일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리하여 흙 위에 선 존재로서의 인간, ‘웰니스’가 아니라 ‘정직한 늙음’과 ‘곧은 마음’을 고민하게 만든다. 그는 진료실을 나와 밭에 앉아도 결국 사람을 본다.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이든, 환자든, 또는 시대 그 자체든.
이 모든 글은 남한산 자락의 ‘보리밭’에서 자판을 두드리며 쓰였다고 한다. ‘보리(菩提)’는 깨달음을 뜻하는 한자어. 세속을 등진 수도자가 아니라, 세속의 흙에 손을 넣고, 그 속에서 가장 낮은 생명을 품으며 삶의 본질을 묻는 초보 농부의 기록. 바쁘고 분주한 도시의 독자들에게 이 책은 ‘텃밭을 가꾸는 자가 남긴 인문학적 소견서’로 읽힐 수 있다.
김경택 저자는 앞서 장편소설 '물고기는 증류수에서 살 수 없다'와 '바람은 인연을 나른다', 소설집 'd-단조' 등 문학작품을 출간했으며, 한의학 전문서 '암을 다스리는 한의학'도 펴낸 바 있다. '보리밭에서 감자를 캐다'는 그간의 집필 활동의 흐름 위에 놓이는 또 하나의 ‘치유적 문장’이다. 이번에는 환자의 병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을 진료하는 이야기이다.
■ 도서 정보
-. 도서명: '보리밭에서 감자를 캐다'
-. 저자: 김경택
-. 출판사: 시간의물레
“머물지 말고 변화해야 한다. 사시사철 변하는 숲처럼 우리들도 변화하고 성장하며 의젓해져야 한다.”
“토양의 오염은 바로 인간의 황폐화다. 건강한 흙에서 건강한 먹거리가 나오고, 그것이 곧 우리의 몸과 마음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