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금이란 일반적으로 철판을 3T이하의 두께로 가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금속 판재를 구부리거나 접거나 구멍을 뚫거나 절단이나 용접을 하는 등의 작업으로 원하는 모양의 제품을 만드는 것이 판금가공이다. 이 판금가공기술은 우리가 접하는 일상 생활의 전기 제품부터 산업 현장까지 무궁무진하다.
삼보정공 김주일 대표는 이 판금가공기술을 바탕으로 선박용 전기외함과 부품을 생산하는 삼보정공을 시작했고, 선박용 유압 유니트(side Thruster)의 개발로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2003년 처음으로 개발하기 시작한 선박용 유압유니트는 매년 발전을 거듭해 2007년에는 자가진단기능을 가진 선박용 Dual Type side Thruster Hydraulic Unit 설계회로 기술개발까지 성공시켰다. 또 고압배전반차단기 인출용 장비인 GCB 리프트 국산화도 완성됐다. 다양한 영역에 적용되는 판금가공기술력과 끊임없는 도전의 결과였다.
포기보다는 희망을 품다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찾는 사람, 겁내기보다 도전으로 길을 찾는 사람, 김주일 대표의 어린 시절은 새로운 도전의 연속이었다. 소장사를 하셨던 부모님의 장남이었던 김 대표는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다. 고향인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귀곡리 시골마을에서 김 대표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지게를 지며 농사일을 도우면서도 틈틈이 책을 보고 공부를 했던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작은 마을의 학교였지만 우등상을 놓치지 않았던 김 대표의 첫 번째 시련은 중학교 입학하던 해였다. 소값파동과 함께 가세가 기울면서 비교적 유복했던 환경이 한 순간에 남의 집 농사일을 도우며 쌀을 빌어먹는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 하루하루 4남매의 끼니 걱정을 하게 된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어려워진 가정 형편의 상대적인 박탈감에 더 열심히 공부를 했고 특별반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다. 하지만 나날이 어려워진 가정형편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장남인 김 대표가 하루라도 빨리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공부보다는 기술을 배우는 것으로 진로를 결정했다. 김 대표는 적은 비용으로 학업을 계속 할 수 있는 국립부산기계공고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기술인의 꿈을 키우게 됐다고 한다.
“기술만 익히면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어떤 사람이 돼야겠다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그 때부터 내 기술로 사장이 돼야 겠다 생각했던 것 같아요”
국립부산기계공고의 학과선택을 배관과로 하게 된 것도 ‘용접기 하나만 있으면 사업을 할 수 있다’ 생각에서였다. 빨리 기술을 익히고 사업을 해야겠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시절역시 착실하게 보냈다. 전기용접, 판금제관기능사 자격증을 이 때 취득했고, 현장실습에서도 우수한 평가를 받았다. 착실하게 고등학교시절을 보낸 김 대표가 방황을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졸업무렵이었다.
국립부산기계공고 배관과를 졸업하면 대기업 조선소로 취업하는 것이 최고였고, 김 대표에게도 조선소 취업추천이 많이 들어왔다. 하지만 현장실습에서 만난 선배들로부터 조선현장의 열악함을 들었던 터라 김 대표는 조선소 취업 대신 중소기업의 선택했다.
“선배들의 푸념같은 이야기를 그대로 믿었던 거지요. 물론 그 때 조선현장의 안전사고는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중소기업 현장이 조선소 보다 더 나을 수는 없었을 텐데 선생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중소기업에 취업을 했습니다”
너무나 매웠던 사회적응기친구와 함께 부푼 기대를 안고 시작한 사회 첫 경험은 너무나 쓰라렸다. 친구와 함께 취업한 중소기업에서 친구가 프레스기에 손가락을 다치면서 김 대표는 입사 한달만에 퇴사를 했다. 열악한 현장 환경과 안전사고에 대한 부담은 ‘기술’로 먹고 살겠다는 생각대신 ‘돈버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고, 상품판매를 중개하는 추라이맨(에이전트)을 시작했다. 하지만 사회는 녹록치 않았다.
상품의 판로를 찾아 공단을 헤매고 다녔지만 쉽게 판로를 찾을 수도 없었고, 어렵게 개척한 판로에서는 대금을 받지 못했다. 날씨는 추워지고 돈은 없었다. 사회는 너무나 냉정했고, 어린 김 대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친구가 일하는 고리원전 건설현장에 취업을 했지만 이번에는 병역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결국, 제대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병역문제를 먼저 해결해야겠다 판단하고 공군에 지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군에 입대하기까지 1년 정도 시간이었습니다만, 너무나 많은 방황과 고민을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기술만 배우면 돈은 쉽게 벌 수 있을거라 안일하게 생각했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목표도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사회초년생에게는 너무나 매웠던 시절입니다”
게다가 35개월의 군생활은 너무나 길었다. 집안은 더 어려워 졌고, 결국 동생이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돈을 벌러 나섰다. 김대표도 제대를 하자마자 취업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지난 4년 여의 공백은 대기업 취업의 걸림돌이 됐고, 결국 고등학교 선생님의 추천으로 다시 중소기업으로 취업을 하게 됐다.
송충이는 솔잎, 나는 판금
고등학교 시절 취득한 판금자격증으로 본격적인 판금전문기능인의 삶을 시작한 것은 조선용 전등을 만드는 중소기업인 대양전기에서였다. 대양전기에서 만드는 전등의 배전반을 담당하며 판금기술의 다양한 적용에 눈을 떴고, 판금분야의 앞선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때마침 (주)KTE에서 일본다이요그룹에에서 수입하던 전기장비를 국산화 한다는 소식을 접했고, 김 대표는 (주)KTE에 판금제를 납품하는 중소기업인 (주)범양계전으로 이직하게 된다. 범양계전에서 보낸 5년은 김 대표가 ‘판금전문가’로 가능성에 눈뜨고 ‘전문기술’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한 중요한시간이었다.
일본식 판금기술을 현장에서 배웠고, 적용했으며, 선박용뿐만 아니라 육상용 전기장비에 필요한 판금기술까지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연히 ‘내 기술로 사장이 되겠다’는 막연했던 꿈이 현실로 다가왔다. (주)범양계전의 주 생산품이 선박용 판금제에서 육상용 판금제로 바뀌면서 전기회사로의 변화를 시작하던 터라 KTE에 선박용 판금제를 공급할 회사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때마침 인근에 인수할 공장도 있었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퇴직금을 모두 모아도 자금이 부족해, 김 대표의 자금으로는 공장인수비용은 물론 회사를 시작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내 사업을 시작할 절호의 기회였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심정’이었다며 그 당시를 회상했다.
그 때 김 대표를 도와준 것은 바로 동생이었다. 어려웠던 집안 형편에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동생이 당시 배운 금 세공기술로 금방을 운영하고 있었고, 그렇게 번 돈을 공장인수비용으로 빌려준 것이다.
변화와 발전의 기본은 기술개발
1991년 5월, 삼보정공의 김 대표의 절실함과 동생의 도움으로 시작해 (주)KTE의 주 거래처로 전기판금을 제작하게 됐다. 범양계전 근무시절부터 해 왔던 일이지만 그 시절에 안주할 수는 없었다. 1994년부터는 일본식 판금가공기술인 용접식에서 유럽식판금가공기술인 부분조립식을 적용해 판넬생산방식을 개선했고 선박용에 맞는 조립식 판넬의 개선을 위해 노력을 거듭했다.
초기의 일본식 판넬은 용접식이라 인건비 비중이 높고 소량생산에 적합한 형태인 반면, 유럽식인 조립식 판넬은 대량생산에 적합하며 가격경쟁력과 품질이 우수해 생산경쟁력이 높았다. 변화와 발전의 노력은 판넬 생산에만 머무른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기술개발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판금기술이 적용되는 분야를 찾던 중 KTE의 제안으로 유압유니트의 개발을 시작하게 됐고, 2003년 유압유니트(Side Thruster)의 개발에 성공했다. 이때 개발된 유압유니트는 지금까지 삼보정공의 성장동력이 되고 있는데, 이것 역시 개발 완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개선점을 찾고 발전시켰다.
김 대표는 2003년 당시 Single Type으로 개발된 유압유니트를 2007년, 자가진단기능을 가진 선박용 Dual Type으로 업그레이드시켜 다시 한번 경쟁력을 확보했고 양산체계도 갖췄다. 뿐만 아니다. 2004년에는 산업용 세탁 피니쉬장비도 개발했다.
세탁 피니쉬장비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었던 터라 직원들과 함께 선진국장비를 보기위해 미국과 중국의 박람회를 찾아가 사진을 찍고 스케치를 하며 기존제품을 분석했고, 이를 바탕으로 개발에 성공했다. 2007년부터는 기업부설연구소를 설립해 본격적인기술개발을 시작했고 대학과의 산학협력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개발된 것이 고압배전반차단기 인출용 장비인 GCB리프트의 국산화(2009년)이다.
삼보정공 창업 이래 지금까지 개발되고 발전된 기술들은 현재 (주)KTE를 통해 세계시장으로 진출하고 있으며 김 대표는 그 모든 기술개발의 중심에 항상 함께했다.
김 대표는 기술개발을 ‘한 우물을 파는 일’이라고 한다. 김 대표는 판금분야 전문가로 판금가공기술을 바탕으로 기술개발에 도전했고, 하나의 기술을 개발하고 발전시켜가고 있다고 한다. 김 대표는 한 우물을 파듯 본인의 기술을 바탕으로 끝까지 한 길을 가다보면 성공할 수 있는 기회는 반드시 온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는 자신만의 기술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것이 지금도 기술개발의 열정을 불태우는 삼보정공의 기술철학이자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설명이다.
현장에서 배운 철학
김 대표는 또 삼보정공의 지속적인 성장의 비결은 ‘현장’이라고 한다. 김 대표 본인이 현장에서 몸으로 배운 기술이 삼보정공의 바탕이 됐고, 그 현장에서의 경험이 지금도 직원들과의 소통의 매개체가 되고 있다는 말이다. 또 못다한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계기를 만들어 준 것도 현장이라고 한다.
‘용접기 하나만 있으면 사업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막연히 결정했던 고등학교 시절 전공이 현장 경험을 통해 꼭 필요한 기술과 더 많이 공부해야 할 기술에 대한 목표를 갖게 했고, 이제야 하고 싶은 공부를 찾아 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때문에 김 대표는 지금도 하루에 두 번씩 현장을 찾는다. 현장 근로자들의 불편함을 미리 챙기고, 그 근로자들도 김 대표처럼 현장에서 희망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또 직원들의 기술력 향상을 위한 지원도 아끼지 않는다. 회사에 근무하면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직원들의 경진대회 참여도 독려한다. ‘인재가 경영의 중심’이기 때문이란다.
올해부터는 모교의 BMT Family 동문위원으로 후배들의 멘토 역할도 시작했다. 고교 졸업 후 매서웠던 사회 첫 경험을 후배들에게 들려주며 후배들이 기능인으로 자부심과 바른 목표의식을 갖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서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어려웠던 시기는 많았지만 포기하거나 좌절하기보다 어떻게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했던 것이 지금까지 도전을 이어오는 힘이 된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지그지글라의 <정상에서 만납시다>를 읽으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갖고자 노력했고, 그때부터 항상 목표를 정하고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습관도 생겼 습니다”
김 대표는 1991년 삼보정공의 설립 이래 지금까지 큰 굴곡없이 회사가 성장해 왔다며, 그 비결이 ‘기술’이란다. 판금가공기술은 전 세계 산업 어디든 기본이 되는 기술이라면서 삼보정공이 독일의 리탈, 미국의 호프만처럼 판금기술만으로도 인정 받는 기술력을 갖출 수 있도록 성장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또 지난 10여 년간 지속적인 성장을 해 온 유공압 부분의 시장개척과 세계 최고의 피니쉬 장비생산도 목표다. 그리고 지금도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쉼 없이 변화하고 발전하고 있다고 한다.
“저는 현장에서 ‘창업’이라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과 새로운 기술의 기회를 잡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달립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항상‘현장기능인’으로의 자부심과 ‘전문기술인’으로의 목표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