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식(日食)이 끝났다. 과거 찬란히 빛났던 해는 질긴 어둠을 밀어내고 예전의 빛을 되찾았다. 알알이 여문 가을 곡식처럼 단단해진 그에게서 여유가 느껴졌다.
하루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비가 쏟아지고, 다음 하루는 비가 물러간 대기층이 필요이상으로 깨끗해져 한층 뜨거워진 햇볕으로 따갑기만 하다. 강욱순 프로를 만나러 가는 길은, 들쑥날쑥 지루하고 변덕스런 장마가 이어지는 날들 중 어느 하루였다. 장마가 지나고 나면 반드시 쾌청한 날이 돌아오듯, 그에게 닥쳤던 시련은 부활의 디딤돌이 되어 회심의 미소를 짓게 된 지금으로 탈바꿈했다.
2003년 부경 오픈 이후, 5년간 쓴 인내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그에게 지난해 8월 조니워커 블루라벨 오픈 우승에 이은 올 상반기 토마토 저축은행 오픈 우승은 그가 명실 공히 다시 돌아왔음을 알리는 청신호였다.
미로 속, 길을 찾다
“골프가 하기 싫었어요. 대회에 출전하기도 싫었습니다. 마음이 그린에서 멀어져 있는데 집중이 될 리가 없었죠.”
2003년 12월, 미국 PGA투어 퀄리파잉 토너먼트 최종 라운드 마지막 홀에서 그는 30cm 거리의 파 퍼트를 놓치며 1타 차로 미국 진출이 무산되고 말았다. 허탈감을 털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후 지독한 슬럼프가 5년간 그의 뒤를 따라 다녔다. 2007년 레이크힐스 오픈 최종라운드 18번 홀에서 어이없는 퍼트 실수를 하고 연장전에서 강경남에게 우승컵을 내줘야 했고, 2008년 필로스 오픈 마지막 날 후반에는 잇따른 버디 찬스를 놓치며 준우승에 머물러야 했다. 결정적인 실수는 다시 도약하려는 그의 발목을 계속 붙잡았고, 때때로 언론의 가십 기사가 되기도 했다.
“경기력이 없으면 후원을 해주지 않습니다. 좋은 성적이 나지 않았지만 삼성은 계속해서 저를 믿고 기꺼이 힘이 돼 주었어요. 10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삼성과 함께 했습니다. 그 믿음에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곁에서 저를 응원해준 지인들이 있었기에 힘들었던 시간을 지혜롭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강욱순 프로는 3년간 정신 수양(단월드)을 했다. 현재는 정기적으로 수련을 하지 않지만, 종종 개인적인 명상을 한다고. 이 수련을 통해 경기 중 격앙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스릴 줄 알게 되었다. 5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더군다나 불혹이 넘은 프로에게 5년이란 그린으로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진흙 구덩이 늪처럼 뒤섞인 시간이었을 것이다. 어떤 선수가 그와 같은 정신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그는 정신 수련이 힘든 시간을 꿋꿋이 지탱토록 한 큰 힘이 되었다고 이야기 했다.
빛은 사라지지 않는다
“토마토 저축은행 오픈 때엔 컨디션이 좋았습니다. 유럽 선수들과의 동반 경험은 여러 차례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긴장하지도 않았고요. 우승했을 때는 물론 정말 기뻤죠. 하지만 상반기 전체를 돌아 봤을 때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경기를 치루면서 완전히 풀리지 않은 날씨 탓인지 등에 근육 부상이 있었어요. 그런데 뒤이어 계속 이어진 투어 일정 때문에 회복시간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좀 더 나은 투어 성적을 내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진 것 같아 아쉽네요.”
7월 말 경에 뉴질랜드로 한 달간 훈련을 떠난다는 강욱순 프로는 예전엔 한 번도 국외로 훈련을 떠난 적이 없다. 변덕 심한 올해 여름 날씨와 체력적인 면을 고려해 이 같은 계획을 세웠다. 조니워커 블루라벨 오픈 우승에 이은, 확실한 슬럼프 종식의 올 상반기 우승 이후 가지게 된 휴식기라서인지 여기저기서 찾아오는 지인들과의 만남으로 훈련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이유도 한 몫 한다며 특유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주로 유연성 훈련에 주력하고 웨이트 운동은 가급적 줄입니다. 나이가 있기 때문에 웨이트에 주력하면 유연성이 떨어져요. 그래서 등산과 같은 운동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근력을 키우고, 유연성 훈련에 집중합니다.”
비거리가 전성기 때만큼 회복되었다는 그는 남은 후반기 대회에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계속해서 투어를 뛰기 위해서 그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고 있는 그에게서 조용히 번져 나가는 빛을 보았다. 강하지만, 봄날의 두근거림 같은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빛…….
그린을 밝히는 길라잡이 등불
“나이가 들어가는 골프 선수에게 위기는 육체가 아니라, 정신입니다. 나이를 먹었다는 생각이 선수를 나약하게 만들고 위기에 빠뜨려요. 물론 저도 한 때 그런 생각을 했었고, 후배들에게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는 말에 수긍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후배들과 동등하게 경기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최선을 다하는 제 모습이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불혹이 넘는 나이에 현역에서 굳건히 활약하는 그의 모습은 후배 프로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고 또한 희망이 될 것이다. 그는 투어프로로서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발휘하는 방법으로, ‘철저한 자기 관리’를 꼽았다. 일반인들이 누리는 모든 것을 다 누리려 한다면, 결코 선수 생활을 오래 할 수 없다. 일정 부분 과감히 포기 할 줄 알아야 흘러가는 세월과 변해가는 주위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전진할 수 있는 것이다.
“젊었을 때의 저는 골프밖에 몰랐습니다. 전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때때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골프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란 것을 알았습니다. 슬럼프에 빠져 자신을 자책하고 있는 후배 선수들에게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힘들게 만들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내적으로 나를 하나씩 채워나간다면, 여유도 생기고 분명 더 좋은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슬럼프의 구덩이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지 모를 후배들을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 강욱순 프로는, 지난해 조니워커 블루라벨 오픈 우승으로 받은 조니워커 클래식 출전권을 기꺼이 후배 김형성(29·삼화저축은행) 프로에게 양보했다. 굴곡의 터널을 지나 온 그에게서 후배를 염려하는 여유와 ‘노력’이라는 말의 의미를 몸으로 채워 갈 줄 아는 흔들리지 않는 힘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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