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일보]
인공지능(AI)과 로봇 기술이 산업 현장에서 작동하기 시작하면서 노동의 개념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이제는 로봇의 고용 잠식 우려를 넘어 알고리즘을 통한 비가시적 통제와 기술 격차에 따른 노동시장 양극화가 당면 과제로 부상했다.
25일 국회에서 열린 ‘AI 로봇과 노동의 미래: 공존인가, 종말인가?’토론회에서는 이러한 ‘노동이 재구성’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제도적 해법이 집중적으로 논의됐다.
기술 진보에 따른 고용 충격은 이미 지표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10월 한국은행 발표 자료에 따르면, 지난 3년간 감소한 청년층(15~29세) 일자리 21만 1천 개 중 98%에 달하는 20만 8천 개가 자동화와 AI 도입 영향이 큰 업종에 집중됐다.
한국경영자총협회(한국경총)는 이러한 변화를 인구구조와 결합해 분석했다. 청년층은 일자리 소멸에 직면한 반면, 50세 이상 중고령 근로자는 디지털 적응도 저하로 인한 생산성 위기에 처해 있다. 김동희 한국경총 근로기준정책팀장은 기술 도입 여력이 있는 대기업과 그렇지 못한 중소기업 간 생산성 격차가 벌어지면서 원·하청 간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고착화될 위험성도 제기했다.
노동계는 AI 도입이 가져올 ‘보이지 않는 통제’를 경계했다. 남민우 한국노총 정책본부 국장은 “업무 지시, 성과 평가, 보상 및 제재조치에 AI 알고리즘이 활용되면서 노동자에 대한 통제 강화, 정보의 투명성 결여, 노동자의 자율성 침해 등이 발생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특히 플랫폼 노동에서 알고리즘이 배차를 제한하거나 성과를 자동 평가하는 방식은 노동자의 단결권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다. 데이터 라벨링 등 AI 학습 과정에서 발생하는 저임금·불안정 노동 착취 구조도 새로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다
이에 노동계는 기술 도입 전 ‘노사 공동 영향평가’ 실시와 알고리즘에 대한 ‘알 권리’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경영계는 현행 노동법 체계가 AI 시대의 속도감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반박했다. 고숙련 전문가들이 투입되는 R&D 분야의 경우 경직된 근로시간 규제가 오히려 국가 경쟁력을 저해한다는 주장이다. 경영계는 ‘고용 유지’라는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 근로자가 언제든 새로운 직무로 이동할 수 있는 ‘고용 가능성’ 중심의 제도 개편을 주문했다.
전문가들은 해외의 선제적 입법 사례에 주목했다. 일례로 스페인은 2021년 ‘라이더법’을 통해 알고리즘이 근로조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노동조합에 정보를 제공하도록 명문화했다. 독일은 ‘직장평의회 현대화법’을 통해 AI 도입과 관련된 근로자 대표의 권한을 명문화했다. 양승엽 한국노동연구원 박사는 “현행 법률만으로는 근로자의 집단적 참여권을 이끌어내는 데 한계가 있다”라며 근로기준법 및 노동조합법 개정을 통해 협의권과 알 권리를 명문화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단순한 규제를 넘어 실제 노동자가 체감할 수 있는 보상 체계를 설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차동욱 국회입법조사처 조사관은 “전환 비용을 어떻게 설계할지가 핵심”이라며 “기술 도입으로 생산성이 향상된다면 그 성과가 임금, 보너스, 근로조건 개선 등으로 가시적으로 연결되는 구조가 마련될 때 비로소 기술 변화에 대한 수용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고용노동부는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오는 6월 ‘산업전환 고용안정 기본계획’을 발표할 예정이다. 정부는 올해 예산 5조 1천억 원을 AI 대전환(AX)에 투입하고 있으며, 고용위기 조기경보 시스템 구축과 생애주기별 맞춤형 AI 역량 강화 훈련을 추진 중이다. 특히 ‘연결되지 않을 권리’ 제도화와 ‘노동 분야 AI 윤리 가이드라인’ 개발을 통해 기술 진보 과정에서 소외되는 노동자가 없도록 포용적 안전망을 강화한다는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