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대한민국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내 한 목숨 아끼지 않았던호국용사들이 있었기에가능했다.6.25전쟁 당시 아군 전사자는 한국군이 22만7,748명, 미군이 3만3,629명, 기타 UN군이 3,194명에 이른다. 전체 아군 전사자들의 영웅적 희생정신을 대신에 여기에 5명의 용사를 소개한다.
■ 조국의 영공 수호, 청춘을 바치다 …이세영 공군 소령
“적진에 돌입하려 함, 굿바이.”
1951년 4월21일, F-51 전투기 조종사 이세영 공군 소령은 적의 군수물자 보급기지를 공격하다 피격된 상황에서 동료들에게 이 한마디를 던지고 적진으로 애기(愛機)를 몰고 돌진했다.
당시는 중공군이 제2차 춘계공세를 위해 많은 군수물자를 전선으로 보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적의 보급로 차단은 매우 중요한 임무였다. 그날 이 소령의 일행은 이천 서북쪽에 위치한 적 진지를 성공적으로 격파했지만, 이 소령의 전투기는 적의 지상 포화에 맞아 검붉은 화염에 휩싸이고 말았다.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을 직감했을까. 이 소령은 양 날개를 두 번 흔들어 작별을 고하고, 전투기를 몰고 적의 보급품 집적소로 돌진해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그때 나이 24세, 조국의 하늘에서 살다 조국의 하늘에서 지는 한 송이 꽃이 되겠노라 다짐하던 그는 조국의 영원한 수호신으로 남았다.
이 소령은 1948년 자유를 찾아 월남한 한국군이다. 한국군이 자신의 고향인 평양을 탈환했을 때, 집에 다녀오라는 상관의 권유에도 ‘완전통일이 될 때까지는 가족을 만나지 않겠다’며 사양할 정도로 그 누구보다도 자유와 평화를 사랑했던 진정한 군인이었다.
■ 서울수복 도화선, 형산강 도하작전 선봉 …연제근 육군상사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아군은 포항의 형산강 일대까지 밀리는 절체절명의 우기를 맞았다. 더 이상 밀린다면 대한민국은 이 땅에서 사라질 형국이었다. 형산강을 사이에 두고 적과 맞선 국군은 돌파구가 필요했고, 그것이 ‘형산강 도화작전’이었다.
제3사단 33연대 1대대의 분대장 연재근 상사는 1950년 9월17일 새벽 12명의 돌격대원을 결성해 도하작전의 선봉으로 나섰다. 돌격 중 적의 기관총탄에 어깨가 관통됐지만, 대원 3명과 함께 끝까지 강을 건넜다. 그는 적의 기관총 진지를 파괴하는데 성공했지만 안타깝게도 적탄에 맞아 21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연 상사의 전공에 힘입어 22연대는 포항지구를 수복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 작전은 이후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압록강까지 북진하는 전기가 됐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전공을 기려 2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무공포장을 추서했다.
연 상사의 동생은 “형님이 ‘자신은 이미 국가에 바친 몸이니 더는 아들로 생각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부모님께 남기고 전쟁터로 떠났다”고 생전의 그를 회고했다. 또 그는 ‘남자로서의 참 본분은 군인으로 봉사하는 일’이라고 결심하고 1948년 1월 국방경비대에 자원입대했다. 지금까지도 그의 우국충정은 국군의 귀감이 되고 있다.
■ “아직 나에게는 오른팔이 있다” …한규택 해병대 상병
1950년 11월20일 해병대 제3대대 11중대는 평남 양덕군 동양리 지구의 보급로 확보를 위해 이 지역에 준동하는 적 패잔병들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동양리 일대는 원산~평양 간 도로의 요충지로, 이곳을 확보하지 못하면 아군의 군수물자 보급이 차단될 상황이었다.
그해 8월 해병 3기로 갓 입대한 한규택 상병(추서 계급)과 그의 동료들은 대대 규모의 북한군과 맞서 싸웠지만, 불리한 지형에서의 방어로 인해 부상자가 속출하는 등 위기상황에 직면했다.
소나기처럼 퍼붓는 적 기관총의 맹렬한 사격에도 한 상병을 비롯한 화기소대 대원들은 위기에 처한 중대의 철수를 위한 지원사격에 나섰다. 선두에 있던 한 상병은 이미 왼쪽 어깨를 부상당한 상태였지만, 적 기관총을 차례대로 명중시켰다. 그러나 마지막 기관총을 격파하려는 순간, 적 탄환이 한 상병의 가슴을 관통하고 말았다.
한 상병은 치명상을 입고 피를 흘리면서도 “나에게는 아직 오른팔이 있다”고 힘줘 외치며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고자 했고, 그의 희생정신으로 11중대는 위기에서 벗어나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자신의 손에서 기관총을 놓지 않았던 한 상병의 투철한 군인정신은 많은 해병인의 가슴속에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 병사 최초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일병 …김용식 육군일병
1950년 8월 북한군은 안강·기계 부근의 비학산에서 12사단과 766유격부대를 편성해 새로운 공격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국군 18연대는 여러 차례 비학산 탈취를 시도했지만 매번 실패했고, 결국 공격작전권은 17연대로 넘어왔다.
‘북한군 제766유격부대 습격’의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17연대 9중대 3소대에 신병으로 배치된 김용식 일병은 특공대의 일원으로 첨병을 자원했다. 첫 작전에 투입됐으나 전혀 당황하지 않고 은밀하게 적진에 침투한 김 일병은 적 경계병을 순식간에 처치한 후, 다른 특공대원들과 함께 적군의 은거지에 기습공격을 가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1950년 8월24일 비학산 전투에 참전한 김 일병은 다시 돌격작전의 선봉에 서서 적 진지를 측면기습해 적 군관 1명을 포함한 15명을 사살·생포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50년 9월29일 김 일병은 경북 안강 시가지전투의 반격작전에서 적의 포격을 받아 장렬히 전사했다.
전투 경험이 전무한 그는 이등병 소총수임에도 불구하고 전투의 최일선에서 용감히 싸워 목숨을 바침으로써 군인정신의 표상이 됐다. 정부는 김 일병의 공적을 기려 1계급 특진과 함께 1951년 태극무공훈장을, 1954년에는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했다. 대한민국 국군 창설 이해 병사로서는 최초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것이다.
■ ‘무적해병’ 명성 얻은 도솔산 전투 영웅 …윤영준 소장
6·25전쟁 당시 도솔산지구는 태백산맥 중 가장 험준한 산악지역인 천연의 요새로 중동부 전선의 심장이었다. 24개 고지로 형성돼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요지로서, 북한군 지상부대 중 최강을 자랑하는 제5군단 예하 정예 2개 사단 병력이 난공불락을 호언장담하던 고지였다.
51년 6월3일 미 해병 제1사단 5연대는 강력한 항공·포병화력 엄호하에 공격을 시도했으나 막대한 인명피해만 입고 공격에 실패하자 다음날 국군 해병 제1연대가 임무를 교대해 도솔산 탈환작전을 인수했다.
북한군의 완강한 반격과 지형적으로 극히 불리한 위치에 있던 우리 해병은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했다. 당시 제1연대 2대대장이었던 윤영준 소장은 악전고투의 육박전과 혈전을 벌인 끝에 도솔산 24개 고지 중 6개 고지를 점령해 아군이 도솔산지구를 완전히 탈환하는 데 결정적 공을 세웠다.
그 이후 적의 완강한 저항에 맞서 결사적인 돌격전을 감행, 17일간의 혈전 끝에 드디어 6월20일 도솔산 24개 고지를 완전히 탈환했다. 이로써 교착상태에 빠졌던 아군 전선에 활로를 개척하게 됐으며, 차기 작전에 대비하기 위한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도솔산전투의 승리는 6·25전쟁 기간 중 해병대 전통의 금자탑을 이루는 5대 작전 중 하나로 해병대의 용맹을 만천하에 떨침으로써 ‘무적해병’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됐다. 그는 이후 해병학교 교장과 동해부대장, 해병대 부사령관을 거쳐 84년 6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