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일보]
한국은 올해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0%를 넘어서는 ‘초고령사회’에 공식 진입했다. 생산가능인구의 급격한 감소와 은퇴 후 소득 공백 문제가 발등의 불로 떨어지면서, 정치권에서는 ‘정년 65세 연장’ 논의가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청년들이 신음하고 있다. 구직 활동조차 포기한 ‘쉬었음’ 청년 인구가 30만 명을 넘어 역대 최대치를 기록하는 등 고용 한파가 매서운 탓이다. 기계적인 정년 연장이 자칫 세대 간 일자리 전쟁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권고’에서 ‘의무’가 되기까지… 정년 60세의 역사
우리 사회에서 ‘법적 정년=60세’라는 공식이 자리 잡은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91년 ‘고령자고용촉진법(현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고령자고용법)’)’ 제정 당시 60세 기준이 처음 등장했지만, ‘사업주가 노력해야 한다’는 권고 조항에 불과했다. 기업들의 통상 정년이 55세였던 시절, 이는 선언적 의미가 강했다.
변곡점은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 상향과 함께 찾아왔다. 2013년 61세로 늦춰진 수급 연령은 5년마다 1년씩 밀려 현재 63세가 됐으며, 2028년에는 64세, 2033년에는 65세부터 연금 수급이 가능하다. 이로 인한 소득 공백 우려가 커지자 2013년 법 개정을 통해 정년 조항이 ‘의무’로 강화됐고, 2016년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을 필두로 ‘60세 정년 의무화’가 시행됐다. 당시에도 청년 고용 위축을 막기 위해 ‘임금피크제’가 함께 도입됐다.
현재 국회는 다시 한번 뜨거운 논쟁의 한복판에 섰다. 제22대 국회에는 이미 정년 연장을 골자로 한 다수의 ‘고령자고용법’ 개정안이 계류 중이다. 노동계는 65세 법제화와 임금피크제 폐지를 주장하는 반면, 재계는 연공서열형 임금 체계하에서의 비용 부담을 호소하며 ‘퇴직 후 재고용’을 대안으로 맞서고 있다.
“정년 1년 늘면 청년 일자리 1.13개 증발”
문제는 10년 전과 달리 청년 고용 시장의 체력이 바닥났다는 점이다. 15일 국회 토론회에서 이수영 고려대 고령사회연구원 특임교수는 “대기업 등 선호 일자리에서 장년층 고용이 1명 늘면 청년 고용은 약 1.13명 감소하는 대체 관계가 뚜렷하다”고 지적했다.
국회입법조사처 역시 보고서를 통해 정년 연장이 대기업 청년 신규 채용을 위축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한국경영자총협회 조사 결과, 미취업 청년의 61.2%가 정년 연장에 따른 채용 감소를 우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토론회에 참석한 송시영 새로고침노동자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은 “법적 정년 연장의 혜택은 이미 고용이 안정된 상위 10%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에게 집중된다”며 “혜택은 일부가 누리고 비용은 청년과 중소기업 노동자에게 전가되는 ‘잘못된 타겟팅’ 정책”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日은 ‘선택권’, 歐는 ‘연금 연동’… 유연성이 핵심”
해외 주요국은 ‘유연성’을 통해 해법을 찾고 있다. 한국과 노동 환경이 유사한 일본은 기업에 선택권을 부여했다. 일본의 ‘고령자고용안정법’은 기업이 65세까지 고용을 확보하도록 의무화하되, ▲정년 연장 ▲계속고용(재고용) ▲정년 폐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유연한 제도를 바탕으로 일본 기업의 99.9%가 65세까지 고용 확보 조치를 시행 중이다.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국가는 법적 정년보다는 ‘연금 수급 연령’을 늦추는 방식으로 은퇴 시기를 조정하고 있다. 반면, 노동 유연성이 높은 미국과 영국은 아예 법적 정년 자체가 없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경직된 노동시장을 고려할 때 일본식 ‘재고용’ 모델이 현실적 대안이라고 입을 모은다. 김덕호 성균관대 국정전문대학원겸 임교수는 “고용과 임금이 유연하지 않은 상태에서 법으로 연장만 강제할 경우, 기업은 채용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며 유연한 제도 설계를 주문했다.
“세대 상생형 연착륙, 세대 공존 위한 ‘골든타임’ 지켜야”
정치권도 정년 연장의 필요성에는 공감대를 형성했지만, 속도와 방식을 두고는 여야 간 미묘한 입장 차를 보이고 있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은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에 맞춰 현재 60세인 법정 정년을 2033년까지 65세로 단계적 확대하는 방안을 대선 공약으로 제시한 바 있다.
민주당이 지난 11월 정년연장특별위원회 1차 회의에서 “연내 정년 연장 논의를 마무리해 법안을 도출하겠다는 방침을 밝혔지만, 여전히 노사 간 합의점을 찾지 못한 상태다. 여당 내부에서도 “‘노란봉투법’과 ‘정년연장법’을 잇달아 처리하면 기업에 과도한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신중론이 상존한다. 실제로 한국경제인협회 등의 분석에 따르면 65세 정년 연장 시 기업이 부담해야 할 추가 비용은 연간 약 30조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제도 개혁에 앞서 정부와 국회 모두 ‘사회적 합의’를 강조하는 만큼 관련 입법이 연내 처리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초고령사회 진입은 단순히 노인 인구가 늘어나는 것을 넘어, 노동시장의 체질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청년 고용 문제와 정년 연장을 ‘제로섬 게임’으로 보기보다는, 세대별 강점을 살려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지속 가능한 한국형 고용 모델’을 설계하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