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일보]
최근 경기도의 한 제조업체에 출근했던 30대 K씨. 경력단절 노동자인 그는 인력사무소의 추천을 받아 일에 나섰지만, 반나절 만에 일을 그만뒀다.
정식 출근 시간인 8시 30분보다 10분 일찍 출근하라고 한 업체의 인사담당자는 K씨에게 고용계약서를 내밀었다. 인력사무소와의 상담 때 1년 이상 일하고 싶다고 밝힌 그였지만, 계약서는 1달짜리 단기 고용이었다.
인사담당자는 그에게 “오래 일한다고 해놓고 며칠 하다가 도망간 뒤에, 고용노동부에 이런저런 신고를 하는 경우가 있어 월별로 계약서를 쓰고 있다”라며 “월급은 3.3% 떼고 지급되며, 4대보험·실업급여는 적용되지 않고, 퇴직금 없고, 대신 6개월 열심히 하면 윗선에 정규직으로 추천해 보겠다”라고 말했다.
임금은 최저시급에 근로조건은 일 8시간 5일 근무라고 명시돼 있었지만, 인사담당자는 “매주 화요일은 9시까지 고정 잔업이고, 물량이 많으면 토요일도 나와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계약서상 ‘시간외 근로’는 시급의 150%를 지급한다고 명시돼 있었다.
K씨는 인사담당자의 말에 귀 기울이며 계약서상 ‘계약의 해지’ 조항을 살폈다. ‘근무태도 불량 3회 이상 경고’, ‘정당한 사유 없이 명령에 2회 이상 불복’과 같은 위압적인 내용 사이 ‘근로자를 선동하여 출근거부·작업거부·작업을 방해하는 자’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K씨는 ‘노동권을 침해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 당황스러웠다고 회상했다.
그 사이 인사담당자는 일할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며 K씨를 재촉했고, 그는 죄송하다고 말하며 계약서에 서둘러 사인했다. 인사담당자는 ‘갱의실’로 그를 안내했다. 낯선 단어였다. 이후 확인해 보니 경의실의 잘못된 말, 탈의실의 옛날 표현이었다.
옷을 갈아입자 선임이라며 다가온 외국인노동자가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 K씨는 우리나라라고 하려다가 한국 사람이라고 말을 고쳤다. 그러자 외국인노동자는 한국사람이 몇 명 있다며 웃어 보였다.
8시 40분, 투입된 작업은 단순했다. 자동화된 라인과 라인 사이에서 생산품 간 병목현상을 해결하고, 잘못된 제품은 빼고, 생산이 완료돼 포장된 박스를 위로 올리면 됐다. 하지만 요령이 없어 힘으로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어깨와 허리가 쑤셔댔다.
11시 2분이 되자 작업반장이 8분의 쉬는 시간을 선언했다. 그러나 방진복을 벗고 작업장 두 개 층 위의 ‘갱의실’로 이동하는 데만 4분이 걸렸다. 사람들은 갱의실 장판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앉을 자리도 없었다. 화장실에 갈까 하고 보니 줄이 길게 서 있었다. 하지만 뻘쭘해할 새도 없었다. 금세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따라 내려가 방진복을 입고 보니 어느새 쉬는 시간이 지나있었다.
그는 남은 50여 분 주어진 일을 소화한 뒤, 점심시간 직전 인사담당자에게 못 하겠다고 연신 죄송하다 고개를 숙였다. 인사담당자는 아무 말 없이 손만 휘저었다. K씨는 아침에 받은 식권을 책상에 올려두고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K씨는 “계약서를 받고 설명을 들으면서 조건이 빡빡하고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정이 급하니 일단 일하겠다고 사인했다”라며 “그러나 쉴 틈이 부족한 근무 여건상 몸이 버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기자에게 전했다.
K씨의 사례를 살펴보면, 해당 업체의 계약 방식은 ‘가짜 3.3% 위장 고용’에 해당할 소지가 있다. 고용노동부는 이를 ‘4대보험 납부 책임과 노동법 적용 등을 회피하기 위해 근로소득세 대신 사업소득세(3.3%)를 납부하도록 하는 등 형식만 프리랜서처럼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단순한 세금 문제가 아니라 노동법까지 회피하려는 계약 방식이라는 것이다.
노동부는 지난해 12월부터 두 달간 가짜 3.3% 위장 고용 의심사업장 100여 개소에 대한 기획 감독을 진행하고 있으며, 올해도 감독을 확대할 계획이다.
또한 K씨가 최소 1년가량 일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음에도 수습계약이 아니라 단기계약을 제시했다는 것은 월 단위 ‘쪼개기’ 형태의 근로계약으로 볼 수 있으며, ‘선동하여 출근거부·작업거부·작업방해하는 자’의 계약을 해지하겠다는 조항도 노동권 침해 소지 있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그의 근무의욕을 꺾은 것은 열악한 휴식 환경도 한몫했다. 계약서상 휴게시간은 점심식사 후 1시간으로 규정돼 있었지만, 화장실조차 자유롭게 이용하기 힘든 제조업에서 감독자 재량으로 주어지는 짧은 휴식은 버거운 노동 강도를 버티게 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하지만 잠시 앉을 곳조차 부족한 좁은 휴게공간과, 화장실 줄만 서다 끝나버리는 부족한 시간으로는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기 어렵다.
제조업에서는 ‘인력난’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법을 교묘하게 비껴가려는 관행과 개선되지 않는 복리후생이 계속된다면, 인력난은 사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버티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로 지속될 수밖에 없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는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외침은 새로운 법·제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존재하는 법을 제대로 지켜달라는 간절함이었다. 이 외침은, 2026년의 제조 현장에서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