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산업, 신흥국 기업 경계경보
LG경제연구소, '낮은가격+기본품질+α'로 한국 등 위협
2000년대 들어 중국, 대만, 터키 등 신흥국의 전자기업들이 낮은 원가 등을 무기로 빠르게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LG경제연구원은 29일 보고서를 내고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자산업을 주도하는 국가들이 신흥 경쟁자들의 거센 도전에 대한 전략적 대응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기가 왔다고 알렸다.
미국의 경제 주간지인 포천이 최근 발표한 500개 글로벌 기업 순위를 보면 신흥국 기업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지난 97년과 올해의 자료를 비교해보면 미국기업은 173개에서 162개로, 일본기업도 110개에서 67개로 줄어든 반면 브릭스(BRICs) 및 중동 등 신흥국 국가의 기업 수는 24개에서 64개로 늘어났다.
◆전자산업 신흥국 기업들의 약진
첨단기술을 요구하는 전자산업에서도 중국, 대만, 터키 등 신흥국 기업들의 약진이 두드러지는 모습이다. 하이얼, 레노보, 화웨이 등 중국 전자기업들은 거대 내수시장, 정부지원, 저임금 노동력, 중국의 세계 공장화 추세 등에 힘입어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
중국 신식사업부의 '차이나 IT 100'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 50대 전자기업의 매출은 9천761억 위안(116조원)에 달했다. 이는 한국 전기전자업종 상장기업 47개사가 거둔 114조원과 맞먹는 수준.
기술·브랜드 면에서 한 수 아래로 여겨졌던 대만 전자기업들도 마찬가지. 대만 기업들은 주로 자체 브랜드 없이 수탁제조(EMS)나 수탁설계제조(ODM) 형태로 사업을 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홍하이, 에이서스텍, 퀀타 등 10대 대만 전자기업들의 매출은 지난해 1천316억달러(122조원)로 2002년 이후 연평균 39.7%의 증가세를 보였다.
대만은 이미 PC 및 주변기기 분야에서 세계 시장을 장악한 상태다. 지난 1월 대만의 시장조사기관 MIC에 따르면 지난해 대만기업들은 생산량 기준으로 노트북에서 글로벌시장의 87.5%, 액정표시장치(LCD) 모니터는 73.4%나 차지했다.
터키의 전자산업도 기지개를 켜고 있다. 유럽·중동·러시아를 잇는 지리적 이점, 유럽연합(EU)과 관세동맹, 저렴하고 풍부한 노동력 등에 힘입어 터키 전자산업의 생산 규모는 지난 2000년 29억달러(3조7천억원)에서 지난 2005년 82억달러(8조3천억원)로 성장했다.
중국, 대만, 터키의 주요 전자기업들은 그간 전자산업을 주도해왔던 일본기업들보다 크게 나은 영업실적으로 올리고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지난 2002년부터 지난해까지 마쓰시타, 히타치, 소니, 후지쯔, NEC 등 5개 일본 전자기업의 평균 매출성장률은 1.9%, 영업이익률은 1.3%에 불과했다.
반면 중국의 통신장비 1위 업체 화웨이는 매출이 지난 2002년 21억달러에서 지난해 84억달러로 연평균 41% 성장했다. 지난해 영업이익률도 12%에 이르렀다. 대만의 전자기기 EMS업체 홍하이의 매출은 지난 99년 18억달러에서 지난해 405억달러로 7년만에 22배나 높아졌다. 영업이익률도 5.6%로 선진 전자기업에 필적한다.
터키의 백색가전기업 아첼릭도 공격적인 인수합병(M&A)으로 지난해 영업이익률이 7.1%에 달해, 세계 1위 백색가전 기업 일렉트로룩스의 영업이익률 3.9%를 압도했다.
LG경제연구원의 나준호 책임연구원은 "일반적으로 낮은 원가를 무기로 하는 기업은 성장을 위해 수익을 희생하는 특성상 성장성과 수익성이 반비례하지만, '신흥강자'들은 빠르게 성장하는 기업일수록 수익성도 높게 나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흥국 도전자들의 5가지 특징
화웨이, 홍하이, 아첼릭 등 대표적인 신흥 전자기업들은 ▲차별적인 저원가 구조의 구축 ▲낮은 가격+기본 품질+알파(α)의 추구 ▲제조·연구개발(R&D) 기반을 이용한 빠른 사업다각화 ▲M&A를 통한 공격적인 확장 ▲기업가 정신 및 과감한 실행력 등을 바탕으로 커나가고 있다.
신흥 경쟁자들은 낮은 임금의 제조 노동력을 활용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가치사슬상에서 차별적인 저원가 구조를 구축해왔다. 홍하이는 배터리, 케이스, LCD, 카메라 모듈 등 다양한 부품을 내재화하고, 협력기업의 엄격한 관리로 구매원가를 절감했다.
화웨이는 제조뿐만 아니라 R&D에서도 낮은 원가 체제를 구축했다. 구미의 선진 플랫폼 기업과 제휴해 기초 기술을 얻고, 중국 뿐 아니라 인도·러시아의 저임금 R&D 인력까지 활용 하고 있다.
성공한 신흥국 전자기업들은 기본 품질과 차별적인 가치 제공을 강조하며 다른 저원가 기업들과 차별화했다. 장루이민 하이얼 회장이 지난 84년 불량 냉장고 76대를 쇠망치로 파괴한 일은 기본 품질의 강조와 관련한 유명한 일화로 꼽힌다.
또 신흥 도전자들은 노동력, 부품, 공장, 물류, 고객 등 공통 제조 기반을 활용해 취급 제품군을 빠르게 다양화했다. 홍하이는 90년대 중반 범용 PC 부품을 납품하는 업체에 불과했지만 90년대 후반 PC 조립사업, 2001년 휴대폰 부품사업, 2003년 휴대폰 조립사업을 각각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얻은 제조기술을 바탕으로 게임기, 통신장비, DVD, 카메라 등 다양한 사업군에 손을 뻗치고 있다.
흔히 M&A는 풍부한 자금력을 가진 선진기업들의 전유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신흥 전자기업들도 공격적인 M&A로 사업을 확장하는데 나서고 있다. 홍하이는 주로 부품기업을 인수하며 빠른 사업 다각화와 고속성장을 이뤄냈다. 터키의 아첼릭도 독일의 블룸버그, 오스트리아의 엘렉트라브레겐즈, 루마니아의 악틱, 영국의 레저, 독일의 그룬디히 등을 인수하며 브랜드 기반을 강화해왔다.
이밖에 런전페이 화웨이 최고경영자(CEO)와 쿼타이밍 홍하이 CEO 등은 과감한 공격경영과 빠른 실행력을 강조하며, 높은 성장을 달성하는 성과를 이뤄낸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칩&칙' 등 차별적인 대응 시급
제품 측면에서 PC, 백색가전 등 성숙기 제품뿐만 아니라 평판 TV, 휴대폰, MP3플레이어 등 주력제품에서도 한국기업들이 신흥 도전자들에 의해 위협당할 소지가 높아졌다.
나 연구원은 "제조, 기획, 마케팅, R&D 차원에서 신흥 도전자와 차별적인 방식으로 변화를 시도해야 할 것"이라며 "한국기업들이 원가경쟁으로 맞불을 놓기란 쉽지도 않고 해서도 안 된다"고 조언했다.
무엇보다 제조 측면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기존 강점인 제조역량을 한 차원 높여, 초제조기업(Super Manufacturing Company)으로 진화해야 할 필요가 있는 시점. 캐논은 셀(Cell) 생산방식으로 공정혁신을 통해 생산성을 극대화했고, 샤프는 부품-세트 간 일관 생산체제의 이점을 극대화했다는 점에서 배울 부분이 있다.
또 전자산업에서도 '싸고 세련된 제품(칩&칙, Cheap&Chic)' 형태의 차별화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다. 지난 90년대 저가경쟁이 시작된 패션, 유통, 항공 산업에선 최근 최저가 제품에서 '칩&칙' 제품으로 트렌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향후 전자산업도 마찬가지 변화가 나타날 것으로 보이는 만큼, 신흥 저원가 기업들의 최저가 공세에 대해 '칩&칙' 전략을 먼저 구현할 필요가 있다.
이밖에 저원가 기술과 개방형 혁신 등 R&D에 기반한 근본적인 원가혁신도 요구된다. 인건비 위주의 제조 부문 원가절감이 한계에 이른 상태에서 남은 부문은 R&D 쪽으로 볼 수 있다. 외부 소비자, 협력사, 연구기관 등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개방형 체제를 구축해, 혁신을 가속화하고 R&D 효과를 극대화해야만 신흥 전자기업들의 도전을 방어해 나갈 수 있는 시점인 것으로 파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