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일보]
산업일보 연중기획 ‘2세 경영, 산업의 다음 30년’이 이번에 만난 인물은 에어드라이어 전문 제조업체 에스엠디(SMD)의 이수 대표이사와 창업주 이종근 회장이다.
이수 대표는 2009년 회사에 합류한 뒤 15년 넘게 설계와 생산 현장을 거쳤다. 경영권을 약속받은 후계자가 아니라 현장에서 자신의 몫을 증명해야 하는 구성원으로 시간을 보냈다.
경기도 평택에 자리한 에스엠디는 지난해 초 대표이사 교체를 단행했다. 2008년 사업을 시작한 이종근 회장이 아들인 이수 대표에게 경영권을 넘겼다.
물려주겠다는 말 한마디 없이 이어져 온 승계 과정을 거쳐 대표이사 자리에 오른 지 1년 반, 이수 대표이사는 조직을 다시 짜고 다음 10년의 그림을 그리는 중이다.
결핍에서 시작된 창업, 그리고 후계자 교육
이종근 회장은 원래 에어드라이어 대리점을 운영하며 국산 제품과 일본 제품을 함께 판매하던 인물이다. 그러나 2008년 엔화가 급등하면서 일본 제품을 원활하게 들여올 수 없게 됐고, 국산 제품은 잦은 하자로 판매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그는 “기술은 있으니 하자 없는 제품을 직접 만들어보자”고 마음먹었다. 2008년 사업을 시작했고 법인은 2011년 설립했다. 창업 당시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다. 이 회장은 “법인을 설립할 때도 자본금 5천만 원이 없어 빌려서 넣었다”며 “돈이 있었다면 나태해졌을 텐데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했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이 회장은 별도의 영업부서와 사후서비스 부서를 두기보다 현장 각 파트가 고객 대응과 품질 책임을 함께 지도록 했다. 현장 책임자가 자신의 부문을 하나의 회사처럼 운영하는 소사장제도 도입했다.
이 회장은 아들에게 승계를 약속한 적이 없었다. “물려주긴 해야 했지만 물려줄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야 했다”는 것이 그의 원칙이었다. 실제로 이수 대표이사는 과거 두 차례 사표를 내고 회사를 떠난 적이 있다. 회사를 물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이 회장의 설명이다.
그는 “네 것이라고 미리 정해줬다면 저렇게 치열하게 일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당연한 것은 없다는 원칙으로 후계자를 키웠다”고 돌아봤다.
아버지의 대리점에서 시작한 현장 수업
이 대표가 아버지의 사업과 가까워진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이다. 방학이면 아버지가 운영하던 에어드라이어 대리점 일을 도왔다. 그는 애초 배낭여행을 떠날 생각이어서 대학 진학에 큰 뜻을 두지 않았다. 진로가 바뀐 것은 아버지가 이 대표 모르게 경기공대에 원서를 넣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면서다. 현재 경기과학기술대학교인 이 학교에 합격하면서 기술을 배우는 길로 들어섰다.
대학 졸업 뒤에는 한동안 아버지와 함께 일했다. 이후 대전에서 5~6년 동안 독립적으로 생활하며 다른 환경을 경험했다. 이 시기에 대해 이 대표이사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부담스러운 면도 있었다”고 돌아봤다.
아버지가 에어드라이어 자체 제작에 나선 이듬해인 2009년 이 대표는 에스엠디에 합류했다. 대학에서 배운 도면 작성 능력을 바탕으로 제품 설계를 맡았다. 이 후 15년 넘게 냉동식·흡착식 드라이어의 설계와 생산을 두루 경험했다. 제품 도면을 그리고 공정의 문제를 해결하는 시간이 그의 후계자 수업이 됐다.
대표이사가 되고 나서야 실감한 ‘결정권자의 무게’
대표이사 취임은 1년 반 전인 지난해 초다. 이 대표이사는 취임 당시를 떠올리며 는 “상무나 이사로 있을 때는 의사결정의 80~90%에 관여했다”며 “나머지 10%의 부담은 대표이사가 되고 나서야 실감했다”고 털어놨다. 실무 책임자일 때는 의견을 내면 됐지만 대표는 결과까지 떠안아야 했다. 그는 “이제는 말 한마디와 선택 하나를 내놓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취임 후 그가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은 조직 체계였다. 기존 생산 현장은 조립과 제관 등 파트별로 나뉘어 있었다. 특정 공정에 일감이 몰려도 다른 파트의 지원을 받기 어려웠고 용접처럼 숙련 인력을 구하기 힘든 분야에서는 인력 운용의 제약이 더 컸다.
이 대표이사는 “각 파트 위에 현장을 총괄하는 책임자를 새로 두고 작업량에 따라 인력을 유연하게 배치할 수 있도록 체계를 바꿨다”며 “각 파트의 전문성도 중요하지만, 다른 파트와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에스엠디는 다른 제조업체와 달리 상무·부장급 관리직이 생산부서 위에 따로 있지 않은 구조다. 자재부와 경리부 역시 독립된 부서라기보다 생산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팔려고 하지 말고, 팔리게 하라
이 대표이사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 중 가장 큰 자산은 ‘관계 중심의 영업 철학’이다. 그는 “기계를 팔려고 하지 말고, 관계를 만들라는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며 “실제로 “신규 거래처를 찾아가서도 제품 설명부터 꺼내지 않았다. 이름을 밝히고 차를 마시며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데 시간을 썼다”고 되짚었다.
“상대방이 오히려 '이 사람이 드라이어를 팔러 온 게 맞나' 의아해할 정도였다”고 당시를 떠올린 이 대표는 “‘가서 팔려고 하지 말고, 팔리게끔 하라는 것’이 아버지의 가르침”이라고 정리했다.
기술적으로는 엔지니어 출신인 아버지가 오히려 영업 현장에서는 설명을 앞세우지 않는 태도를 강조해온 것도 그가 물려받은 원칙 중 하나다.
이 회장은 “제품 지식을 앞세워 상대를 이기려 들면 오히려 거부감을 줄 수 있다”며 “직원들에게도 거래처에서 일방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상대의 요구를 먼저 들으라고 가르친다”고 전했다.
이수 대표이사가 그리는 다음 10년
향후 10년의 리더십에 대해 이 대표는 앞으로의 경영 원칙으로 신중함과 겸손을 꼽았다. 그는 “기술력을 앞세우기보다 고객사가 신뢰할 수 있는 제품과 대응 방식을 하나씩 다져가겠다”고 밝혔다.
가장 구체적인 과제는 기존 제품의 세대교체다. 냉동식과 흡착식 에어드라이어의 구조와 성능을 개선하는 작업을 이 회장과 함께 준비하고 있다. 그는 “기존 제품을 안정적으로 사용해온 고객사에서는 ‘왜 잘 작동하는 제품을 굳이 바꾸느냐’는 우려가 나올 수 있다”면서도 “시장 변화를 고려하면 이제는 세대교체를 시작해야 할 시점”이라고 내다봤다.
개인적인 목표에 대해서는 “결국 대표이사 혼자 회사를 키우는 게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 그는 “직원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는 것, 고객에게 신뢰받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 회사를 키우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사명 에스엠디가 ‘Surprise Miracle Dryer’의 머리글자를 딴 이름이라며 국내를 넘어 해외 시장에서도 신뢰받는 브랜드로 성장시키겠다는 목표를 내놨다.
여전히 현장에 있는 아버지
이 회장은 대표이사 자리를 넘긴 뒤에도 매일 현장을 둘러본다. 그는 승계를 등산에 빗대며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내려오는 일이 훨씬 어렵다”고 했다. 회사를 일으킨 자신의 방식을 내려놓고 새 대표의 판단을 존중하는 일 역시 승계의 한 과정이라는 뜻이다.
서른 즈음으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는 “인생은 문제의 연속이다. 문제를 피하는 사람과 만드는 사람이 있을 뿐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도전은 젊을수록 좋고, 도전이 빠르면 성공도 빠르게 온다”고 답했다. 창업으로 문제에 뛰어들었던 자신의 선택을 돌아보는 답이었다.
승계를 약속받지 않은 채 이어온 오랜 현장 경험은 이수 대표를 설계자와 생산 책임자에서 기업의 최종 결정권자로 옮겨 놓았다. 이 대표가 물려받은 것은 완성된 성공이 아니라 다음 성장을 증명해야 할 책임이다. 아버지가 세운 방식 위에 자신의 조직과 제품을 더하는 일. 에스엠디의 세대교체가 평가받을 시간은 이제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