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일보]
유럽태양광발전산업협회(EPIA=European Photovoltaic Industry Association)의 발표에 따르면 전 세계 태양광 발전시설의 총 발전 능력이 2012년 말에는 2010년 말 기준 대비 40% 증가해 처음으로 1억KW를 돌파했다고 한다. 100만 KW급 원전 100기에 상당하는 수준이다. 지난 2009년 2천만 KW이상이었던 총 발전 능력이 대폭적으로 증가하면서 세계적으로 태양광 발전의 붐이 지속돼 온 것이다. 게다가 독일, 스페인 등 유럽 각국이 중심이 되던 태양광 발전시설도 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로 확대됐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재생에너지의 보급률이 높은 지역으로 제주도가 꼽힌다. 섬지역의 특수성과 청정지역이라는 이미지 확립 정책으로 신재생에너지의 적용과 보급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의 신재생에너지 분야 중 태양광 발전시스템의 제작과 설계시공을 이야기할 때마다 거론되는 기업이 보타리에너지(주)(대표이사 김홍삼)이다. 보타리에너지(주)는 20년간 축적된 김홍삼 대표의 전기분야 및 배관자재 특허화 사업의 전문지식과 경험이 신재생에너지 분야의 태양광 발전시스템이 접목돼 신재생에너지 전문기업으로 인정받고 있다.
좌절이었던 공업고등학교 진학, 인생의 전환점이 되다
제주도 제주시 한림읍. 김홍삼 대표는 고등학교까지 한림읍에서 지낸 제주도 토박이다. 김 대표가 나고 자란 50~60년대의 제주도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여파가 고스란히 남아 유난히도 어렵고 힘들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한림읍은 제주시가지에서 서쪽으로 치우친 작은 어촌마을이었다. 2남3녀 중 장남이었던 김 대표는 학교를 마치면 곧장 부모님이 일하시는 밭으로 달려가 일손을 거들면서도 막연히 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고 한다. 때문에 특별히 전기 분야에 대한 관심도, 재능도 찾아보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교사가 꿈이었으니 당연히 인문계고등학교로 진학하고 다시 대학에서 공부를 하겠다 생각했던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제주시에 있는 오현고등학교의 원서를 작성했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환경은 그의 꿈을 지지해 주지 못했다. 제주시내에 있는 오현고등학교는 한림에서 통학이 불가능해 제주시내에서 생활을 해야 하는데, 그럴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김 대표의 부모님은 한림에 있는 한림공업고등학교로의 진학을 권유했고, 가정형편에 대한 원망은 어린 소년의 가출로 이어졌다. 한림공고의 입학전형 시험이 있던 날, 김 대표는 마을을 뒤져 김 대표를 찾아온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서야 입학시험을 치르러 갔고, 결국 한림공고 전기과에 입학을 했다. 대학 진학의 꿈을 접고 등 떠밀려 입학했으니 공부가 머리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비교적 왜소한 체격이라 동급생들에게 무시를 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태권도를 시작했고, 학교보다는 체육관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려운 가정형편을 드러내놓고 불평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묵묵히 기술을 익히기엔 억울했던 사춘기 시절의 유일한 돌파구가 태권도였다.
2학년이 돼서도 태권도에만 빠져있었던 김 대표에게 담임선생님은 “체격조건이 왜소해 태권도로 성공할 수 없으니 마음을 잡고 공부에 전념해라. 현재에 충실하면 대학진학의 기회도 생길 것이다”며 대학진학에 대한 희망과 함께 방송실에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방송반장을 시켜주셨다고 한다. 김 대표의 아버지 또한 “한림공고의 교훈인 기술보은(技術報恩: 기술을 익혀 부모,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고 국가, 사회에 봉사한다)처럼 훗날 많은 사람에게 기술로 도움이 되는 인재가 되러 달라”는 당부로 그의 방황을 잡아 주었다. 뒤늦은 시작이었지만 공부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고, 전기공사기능사 자격증도 따면서 기술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다. 그리고 다행히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그렇게 바라던 대학진학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학을 가도 어려운 가정형편은 달라지지 않았다. 대학 등록금과 서울에서의 생활비는 고스란히 김 대표가 해결해야 할 몫이었고, 어려운 대학생활을 유지시켜준 것이 바로 고등학교 시절 익혀둔 ‘기술’이었다. 고등학교 때 취득했던 전기공사기능사 자격증 덕분에 야간 변전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고, 야간 근무를 함으로써 잠을 잘 수 있는 공간과 대학생활비를 모두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서야 김 대표는 공업고등학교로의 진학이 인생의 좌절이 아니라 인생을 설계하는 또 하나의 시작이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좌절과 방황 끝에 찾은 기술인의 길은 대학 졸업 후 기술고시라는 더 큰 목표를 만들어 주었다. 현장에서 기술을 적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나라 기술정책의 틀을 잡는 일을 해 보고 싶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꿈을 향해 도전을 하기도 전에 그 꿈은 다시 한 번 좌절하게 된다. 고향에 계신 아버님께서 신장결석으로 신장을 도려내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큰 수술이라 의료보험 없이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족 중 누군가 직장을 다녀야만 의료보험에 가입할 수 있었던 시절이라 망설일 여유도 없이 취업전선으로 향했다고 한다.
기술의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직장생활
김 대표의 첫 직장은 강원도 오지의 송전철탑공사현장이었다. 대학시절 취득한 전기공사산업기사 자격증덕분에 송전철탑공사현장의 현장대리인으로 근무하게 된 것이다. 지금이야 현장 근무여건이 많이 좋아진 편이지만 당시의 송전철탑공사현장은 말 그대로 ‘현장’이었다고 한다. 번듯한 건물하나 없이 천막을 쳐서 현장사무실을 운영했고, 게다가 강원도 오지였으니 그 환경이야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는 김 대표. 새로 부임하는 현장소장이 3개월도 채 근무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현장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열악한 현장이었지만, 김 대표는 아버님의 병원비를 위해서도, 또 꿈을 포기하고 도전하는 첫 시작이기 때문에도 그만 둘 수 없었다고 한다. 언제나 남들보다 한 시간 먼저 출근했고, 4.8km 산악현장을 하루 두 번 돌아보면서 현장을 살피고 같이 일을 했다. 누구나 다 적자를 예상한 현장공사를 30% 흑자로 전환시킬 수 있었던 것은 김 대표가 밤낮없이 현장을 살피고 상황을 개선해 나갔기 때문이었다.
첫 직장에서의 성과가 소문이 나면서 김 대표를 찾는 기업이 하나 둘 생겼다. 그러던 중 동원탄좌개발(주)의 영구 수갱(광산이나 탄광에서 수직으로 파내려간 갱도) 5MVA(mega volt ampere) 변전시설의 동력공사현장의 현장대리인 자리를 제안 받아 근무를 시작했다. 송전철탑공사현장보다 규모도 컸고 다국적기업인 AEG와의 합작공사 현장이라 앞선 기술을 배우고 적용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두 번째 직장 역시 현장의 근무여건은 열악했지만 매일 탄광의 막장까지 오가며 현장을 점검했고, 문제를 해결해 갔다. 현장 곳곳을 누비며 일을 하는 모습에 ‘불도저 같은 사람’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최선을 다한 덕분에 현장대리인으로 시작한지 3개월 만에 현장소장으로 승진했고, 공사가 끝날 때 까지 현장을 지휘했다. 김 대표는 강원도 오지의 열악한 현장에서의 근무였지만 공사 현장 전체를 지휘해본 경험과, 다국적 기업 AEG와의 합작현장에서 배운 기술, 그리고 현장관리 시스템을 접해본 경험은 후에 기업과 기술을 키우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기술에 대한 자신감, 내 이름을 걸고 도전하다
현장에서 익힌 기술과 관리능력으로 내 일을 하고 싶었다는 김홍삼 대표는 1989년 전기공사업체를 인수해 관급공사 위주의 전기공사를 시작했다. 말이 사업이지 시작은 미미했다고 한다. 직원을 고용할 형편도 되지 않아 경리는 부인이 보고, 나머지 일은 김 대표가 직접 했었다. 하지만 하나 둘 공사 현장이 늘면서 직원들이 늘어나고, 회사는 조금씩 성장했다. 회사가 성장하면서 김 대표가 집중한 것은 기술력이다. 수많은 전기공사업체와 차별화 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김 대표만의 기술을 인정받는 길이라 생각해 전기공사현장에 필요한 부분을 중심으로 기술개발에 도전했다. 그렇게 개발하기 시작한 것이 배선용 덕트와 접지장치이다. 1987년 미국대사관과 외국계 회사의 전기공사를 진행하면서 수입제품에 의존하던 전기배관제인 ‘배선용 덕트’를 국산화해 특허를 등록하고, 제품을 생산하면서 ‘전력분야 전문기업’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김 대표는 또한 개인의 기술뿐만 아니라 구성원 모두가 기술 인력으로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고 판단해 직원들의 자격증 취득과 경진대회 참가, 특허 출원을 독려했다. 이를 통해 대표와 구성원 모두가 기술인으로서 자긍심을 갖는 ‘기술기업’이 된 것이다. 이렇게 기술력으로 다져온 덕분에 김 대표는 외환위기도 잘 넘길 수 있었다고 한다.
어려웠던 외환위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갔다고 생각할 즈음 김 대표는 뜻밖의 사건을 겪는다. 상용화돼 판매되고 있는 제품에 대해 경쟁업체에서 민·형사상 무차별 소송을 제기했고, 특허와 의장등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4년간의 지루한 싸움을 하게 된 것이다. 소송이 모두 김 대표의 승소로 끝이 나긴 했지만 4년간의 지루한 싸움은 김 대표에게 기술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했다, 타지인 서울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잘 하고 있다 생각하고 있을 즈음 벌어진 일이라 김 대표의 절망은 더 컸다고 한다. 이후 2002년, 제주국제공항면세점의 전기공사를 수주하면서 찾은 고향에서 심정적으로 위안을 느꼈다는 김 대표는 고향 제주로의 귀향을 결심했다.
태양광, 제주도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전기기술
김 대표가 태양광 전기공사를 접한 것은 2004년이다. 태양광 발전장치 건설현장에 하도급을 받아 시공을 하면서 태양광의 장래성을 직감적으로 알았고, 아직은 많은 기업이 참여하지 않고 있어 먼저 시작해 기술력을 갖추면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보타리에너지의 ‘보타리’는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의 제주도식 지명이다. 넓은 들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금의 보타리에너지(주) 본사의 지명이다. 김 대표는 ‘제주도의 넓은 들판을 지키고 가꿀 수 있는 신재생에너지 전문기업’으로 보타리에너지(주)를 키우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김 대표의 생각을 담은 보타리에너지(주)는 크게 신재생에너지분야와 배전보수 사업부로 나누어 운영된다. 신재생에너지분야는 태양광 전지판, 접속반, 모니터링시스템 제조 및 설치를 주력으로 하고 있는 태양광 사업부이며, 배전보수 사업부는 한국전력의 배전보수협력업체로 지정돼 제주시내의 배전보수를 담당하고 있다. 김 대표는 접지 및 태양광 모듈 등의 특허화로 이미 태양광 분야에 기술력을 축적하고 있으며, 태양광 저장 시스템의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에너지 저장장치인 ESS를 태양광에 결합시킨 이 기술은 전기가 필요한 용도와 환경에 따라 활용도를 높여 에너지 수급을 지속적이며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기술이다. 이를 바탕으로 LED, 풍력시스템, 스마트 그리드까지 신재생에너지 전문기업으로 기술력을 확장하고 있다.
김 대표는 태양광산업 역시 태양광을 전기로 바꾸고 저장하며 이용하는 모든 과정이므로 당연히 ‘전기’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기술이 필요하다고 한다. 때문에 한 순간에 떠오른 사업아이템이 아니라 20여년 전기기술인으로 한길을 걸어온 덕분에 찾은 분야라는 설명이다.
송충이, 솔잎으로 기술보은(技術報恩)하리라
김대표는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산다”의 의미를 ‘기술’에 비유한다. 자신만의 기술이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나만의 솔잎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또한 기술을 ‘지상 최고의 나눔’이라고 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술이 어디에선가 사용돼진다면 그것은 전 인류를 위해 공헌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태양이 빛으로, 열로, 전기로 우리의 삶을 밝히듯이 기술 또한 그러하다는 설명이다. 큰 기업이 아니라 장수하는 기업이 목표라는 김 대표는 건축물의 설계에서부터 태양광을 접목시킨 스마트 그리드 전문기업으로 보타리에너지(주)를 이어가고 싶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