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일보]
AI(인공지능)로 무장한 ICT 기술은 마치 해일과 같은 속도로 디지털전환(DX)을 요구하고 있다. 시대는 이 거대한 파고에 제때 올라타지 못한 우리들을 탓하며 ‘너희는 끝났다’라고 손가락질하는 듯하다. 다행히도 우리의 현장에는 아직 AI·디지털 기기가 도입되지 않았다. “여기만큼은 안전할 거야”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그때, 스마트 태블릿 PC ‘릴리패드’가 눈앞에 등장하고야 만다. 6월 개봉한 영화 ‘토이스토리5’의 이야기다.
이들이 겪는 극심한 불안감은 AI가 기업 경쟁력과 조직 운영방식을 재편하는 현재 비 ICT 기업, 특히 전통 제조 업체 사이에서 팽배해진 ‘AI 전환(AX)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만다’라는 위기감과 닮아있다.
그러나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첨단기술을 쫓아내자’가 아니다.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오히려 본래의 목적을 흐릴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최근 기업들이 AI를 경쟁력 확보의 수단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정작 해결해야 할 현장의 문제와 도입 목적을 놓치는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AX를 위한 AX, ‘대내적 AI 워싱’의 덫
영화에서 태블릿 릴리패드는 최첨단 놀이 기능으로 무장했다. 아이의 음성을 인식해 취향에 맞는 인터랙티브 콘텐츠를 제공하고, 교우 관계나 또래 그룹의 트렌드를 분석해 맞춤형 놀이 솔루션을 제시한다.
그러나 아이의 외로움을 달래고 진짜 친구를 만들어주겠다는 본래의 취지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보니의 취향이나 관심사보다 단순히 거리상 가까운 또래들을 친구로 등록한 탓에, 그들은 보니를 친구보다는 게임을 위한 ‘머릿수’ 정도로 취급한다. 심지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보니의 취미를 조롱하는 ‘사이버폭력(Cyber bullying)’도 서슴치 않는다.
릴리패드의 문제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아이의 행복'이라는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많은 친구와 연결한다’라는 목표는 있었지만, 거리와 데이터만으로 관계를 판단한 결과 보니에게는 상처만 남겼다. 산업 현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해결해야 할 문제보다 AI를 적용하는 것 자체에 관심이 쏠리는 순간, 기술은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 아니라 보여주기식 성과를 만드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SPRI)가 발간한 ‘SW중심사회 7월호-AI 워싱과 테크노스트레스: 보여주기식 AI 전환이 조직에 남기는 것’보고서는 기업의 ‘AI 워싱’과 ‘테크노스트레스’에 대해 경고했다.
제품이나 서비스의 친환경성을 과장하는 ‘그린워싱’에서 유래한 ‘AI 워싱’은 기업의 실제 역량과 무관하게 AI 도입을 과장되게 전시하는 행태를 뜻한다. 단순한 자동화를 포장하거나, ‘스마트’와 같은 용어를 근거 없이 제품·솔루션에 이름 붙인다. 보고서는 이러한 대외적인 리스크와 더불어, 조직 내부에서 일어나는 ‘대내적 워싱’형태로도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데이터사이언티스트 김영우의 페이스북 게시글을 사례로 인용했다. ‘기업 경영진이 외부 모임이나 매체에서 들은 화려한 AI 성공 사례에 자극받아 명확한 목표나 자원 배분 없이 하향식으로 AI 과제를 추진한다. 손 빠르고 군말 없는 직원들을 차출해 TF를 꾸리고, 이들은 단기 속성 특강만으로 메울 수 없는 기술 격차를 떠안은 채 시연용 ‘데모’를 만들어낸다. 경영진은 시연회에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사내 우수 사례로 선정하고 “우리도 이제 AI 네이티브 기업”이라 대외적으로 선언하지만, 정작 실무에서 이를 유용하게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러한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기업 내부 AI워싱은 전시된 성과와 실제 현장 사이의 간극이 문제가 된다고 보고서는 짚었다. 겉 포장만 AI로 칠해진 데모의 이면에, 실실적 재무 및 업무 성과의 부재라는 실상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충분한 기술력을 갖춘 AI라 하더라도 목적과 가치가 잘못 설정되면 기대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보고서가 지적한 대내적 AI 워싱 역시 기술보다 ‘AI 도입’ 자체가 앞서는 현실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모습이다.
이 과정에서 조직 구성원들은 극심한 테크노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새로운 디지털 기술에 적응·대처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심리적 불안과 정서적 긴장상태를 뜻하는 용어다.
보고서는 ‘AI를 사용하면 일이 금방 끝난다’는 경영진의 말과 달리 무작정 늘어나는 업무량(기술과부하), 디지털 도구로 인한 상시 연결 압박(기술 침해), AI를 활용하지 못하면 뒤처지고 대체될 수 있다는 불안감(기술불안정성) 등이 구성원들의 일상을 침범할 수 있다고 짚었다. 이렇게 절차와 업무만 가중되면서 직무 만족도 저하와 같은 조직 전체의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당장의 도입보다 사람과 목적이 먼저다
악역으로 그려지던 릴리패드는 자신이 소개해 준 친구들 때문에 보니가 사이버폭력의 피해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낀다. 휴게소에서 시름에 잠긴 보니가 잠시 딴 곳을 보는 사이, 릴리패드는 기부 단체 트럭의 박스 속으로 몸을 던져 그의 곁을 떠나려 한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기술이 ‘과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떤 가치를 담아내려는 ‘철학’이 먼저 있어야 함을 분명하게 짚어낸다.
보고서는 ‘실체 없는 AI 전환의 전시는 조직 외부의 평판 리스크에 그치지 않고, 내부에서 구성원의 심리적 소진으로 전이된다’라며 ‘AI 전환의 진정한 척도는 ‘AI 네이티브’라는 선언이 아니라,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기술의 변화를 위협이 아닌 적응의 기회로 전환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는가에 있다‘라고 강조했다. 당장의 전시 대신 역량의 토대를 다지는 것이 현실적인 과제라는 것이다.
토이스토리5는 제시를 필두로 장난감들이 릴리패드를 구출하고, 함께 힘을 합쳐 보니처럼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 좋아하는 ‘블레이즈’를 연결해 주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결국, 기술 그 자체는 죄가 없다. 자리를 빼앗겼던 전통 장난감의 ‘온기 있는 감성’과 최첨단 디바이스의 ‘스마트한 연결’이 손을 잡아 문제를 해결했듯, 산업 현장에서도 AI는 사람과 조직의 철학을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를 실현하는 도구여야 한다. 보여주기식 AI 전환이 아닌,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과 역량이 먼저 갖춰질 때 비로소 진정한 AI 전환이 완성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