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만드는 즐거움으로 보낸 어린 시절
천 대표는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이 고향이다. 농사를 짓는 부모님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학교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던 소년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있기 보다는 산과 들에서 놀기를 좋아했던 그였지만 지기 싫어하는 성격으로 성적은 언제나 상위권을 유지했다. 천 대표는 손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해 스케이트나 장난감도 직접 만들어 가지고 놀았다. 서툰 손놀림이었지만 한번 시작하면 꼭 완성을 해야 직성이 풀렸고, 그러다보니 손에 상처가 없는 날이 없었다.
“직접 만드는 것 자체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 이것저것 만들어 가지고 놀았는데, 장난감 만들다가 다치기도 많이 했어요, 그때 생긴 상처 흉터가 아직도 손등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기계에 관심이 많았으니 빨리 기술을 배워 내 손으로 기계를 만드는 일을 해 보고 싶었다. 고등학교 진학도 당연히 공업계고등학교를 생각했다. 담임선생님은 이왕이면 전국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모이는 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로 진학을 권했고, 고등학교 진학을 계기로 천 대표는 부산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세 번의 신입사원 생활의 경험
“중학교때는 시골학교라 그런지 큰 노력 없이도 상위권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고등학교는 다르더군요”
지기 싫어하는 성격 탓에 처음으로 시험공부를 열심히 해봤다는 천 대표. 학교공부 외에는 고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였을 정도로 공부에 매진했고, 그 덕분에 3학년 1학기 때에 삼성중공업 그룹 공채에 합격 했다. 기계분야에 좀 더 깊이 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 생각했던 천 대표는 내심 삼성정밀(현 삼성테크윈)로 발령을 받고 싶었지만 거제에 있는 삼성조선(현 삼성중공업)으로 발령을 받았다. 학교에서는 가까운 거제였지만, 고향집과도 멀었고, 무엇보다 세분화된 기계분야에서 일을 해보고 싶었던 그에게 첫 직장 생활은 그리 즐겁지가 않았다. 결국 6개월 뒤 안양의 만도기계로 이직을 선택했다. 천 대표는 다시 시작한 신입사원의 생활이었지만 자동차 부품의 금형을 담당하며 그 안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신념으로 업무에 매진했다.
“지금이야 자동화가 돼있지만 당시의 금형작업은 하나하나 손으로 직접 그리고 만들어야 하는 정밀한 작업이었습니다. 제 손을 통해 만들어지는 금형을 보며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만도기계에서 그는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고 원활한 업무처리와 깔끔한 마무리로 인정도 받았다. 당시 만도기계에서는 외국에서 수입하던 금형의 국산화 작업을 진행 중이었고, 천 대표는 그 가운데에서 다양한 금형의 제작에 참여했다. 하지만 업무에 매진을 하면 할수록 마음 한 구석의 갈증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현장에서 배우는 기술에 대한 이론적인 지식에 대한 갈증이었다.
“학창시절에는 왜 공부를 해야 하는 지 이유를 모르고 공부를 했었는데, 그제서야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현장에서 기술을 알면 알수록 그에 대한 이론이 궁금해 졌고, 점점 더 많은 것에 대한 의문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진학을 생각한 것도 이 때였다. 결심과 동시에 만도기계를 퇴사해 입시준비를 했고, 인천대학교 전자공학과로 진학 했다.
“앞으로 어떤 기술이 필요할까 고민을 했습니다. 단순히 기계를 공부하는 것보다는 앞으로 유용하게 쓰일 다양한 분야를 해 보고 싶어서 메카트로닉스에 관심을 가졌
고, 전자공학을 전공으로 선택했습니다”
늦게 시작한 공부이기도 했지만 현장에서의 갈증을 해결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는 천 대표는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대졸 신입사원으로 주식회사 만도에 입사를 했다.
그의 세 번째 신입사원 생활은 에어컨 제어기에 대한 기술을 담당하는 업무로 시작했다. 지금까지 경험한 기계와는 또 다른 전기전자의 제어부분에 대한 새로운 시작이었다.
“전공을 바꾼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하기 위한 도전이었습니다. 30대에 하는 많은 경험이 후에 제 재산이 될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주식회사 만도의 에어컨 사업부가 위니아 만도로 계열분리가 되면서 그는 위니아만도에서 5년을 근무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마지막 직장인 ㈜파워로직스로 이직을 하게 된다.
“다양한 경험을 해 보고 싶었고, 지금까지 제가 경험한 기계와, 전자, 제어의 모든 역량을 담을 수 있는 일을 찾았는데, 그곳이 파워로직스 였습니다”
㈜파워로직스에서 그는 연구소를 맡아 연구개발에 주력했다. 리튬이온배터리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는 단순히 연구에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내회사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일했다. 그리고 4년 뒤인 2006년, 천 대표는 4명의 동료와 함께 지금의 ㈜미섬시스텍을 창업했다.
창업, 그리고 기술개발
㈜미섬시스텍은 4명의 엔지니어들이 함께 창업한 회사다. 천 대표를 비롯 다양한 경험을 한 엔지니어들이 만들어낸 첫 번째 제품은 소변기 센서였다. 제품 성능은 말 그대로 획기적이었다. 기존의 제품의 배터리 수명이 2년에 불과했다면 미섬시스텍의 제품은 최소 4년 이상의 수명을 가지고 있었고, 디자인 역시 수려했다. 하지만 시장진입은 쉽지 않았다. 영업에 대한 경험이 없었으니 어떻게 시장에 나가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고, 시장 대응력도 낮았다. 결국 첫 번째 제품은 보기 좋게 실패로 끝났지만, 경험은 시장에 대한 교훈을 남겨줬다.
“제품이 좋다고 꼭 시장에서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 때 배웠습니다. 소변기 센서는 실패로 끝났지만, 시장의 필요성과, 마케팅, 영업력을 모두 갖추어야지만
제품이 성공할 수 있다는 큰 교훈을 얻은 경험이었습니다”
두 번째 아이템은 4명의 엔지니어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 중에서 가장 자신있게 제품화 할 수 있는 것이 지금까지 해 왔던 ‘리튬이차전지 보호회로 검사장비’라 판단, 개발에 들어갔다. 천 대표는 기계설계와, 회로설계, 펌웨어 프로그램 개발을 담당했다. 지금까지 해 온 기계와, 전기, 전자, 제어의 모든 분야 경험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영업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으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술에 대한 인정을 받는 방법을 택했다. 먼저 샘플제품을 납품해 제품에 대한 평가를 받기로 한 것이다. 그만큼 기술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다.
“2007년, 처음 검사 장비를 개발해 샘플 납품을 완료했을 때였습니다. 납품한지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고객사에서 전화가 왔어요. 그러고는 다짜고짜 ‘뭐 이런 장비가있냐?’고 묻는 겁니다. 깜짝 놀라 제품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 물었더니 ‘자기가 본 최고의 제품’이라며 기존의 제품을 저희제품으로 교체하겠다는 주문을 하더군요”
기술로 먼저 인정을 받겠다는 전략이 통한 것이다. 비록 영업에 대한 경험은 부족했지만, 이를 기술력으로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시장진입은 더디지만 기술에 대한 확신으로 오랫동안 고객의 신뢰를 얻는 방법이라는 사실도 배웠다.
전지관리장치(BMS) 개발로 E-Vehicle, E-Bus 상용화 기여
기술력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매출은 조금씩 늘었다. 천 대표는 보호회로 검사장비 뿐만 아니라 이차전지 관련분야로 기술개발의 범위를 확장했다. 매출 증가보다는 발전 가능한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휴대전화 보호회로(PCM) 검사장비에서 시작한 기술개발은 E-BIKE, E-SCOOTER용 전지관리장치(BMS) 개발로 확장 됐고, 이후 E-Vehicle, E-Bus, Hybrid Tractor의 BMS까지 개발완료 함으로써 E-Vehicle, E-Bus, E-Bike, E-Scooter, Hybrid Tractor의 상용화에 기여했다. 지금도 천 대표는 전기자동차와 에너지저장장치(ESS)용 리튬이온배터리 팩 및 전지관리장치(BMS)를 개발 완료해 샘플테스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도로공사 무정전전원장치(UPS)용 전지관리장치(BMS)도 개발 완료해 시범운영중이다. 이로써 ㈜미섬시스텍은 차세대 에너지 저장장치인 UPS, ESS 개발기술의 확보로 친환경에너지 시장 진입 준비를 모두 마친 셈이다.
“창업 후 9년차 이지만 기술개발에 매진하고 있어 매출의 대부분이 검사장비가 차지하고 있습니다만, 샘플테스트에서 안정성이 높은 것으로 인정받고 있어 기술기반
을 확보했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엔지니어 넷이서 시작한 그때처럼 지금도 미섬시스텍은 80%이상이 연구 인력이다. 천 대표 역시 연구원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어 미섬시스텍은 리튬이온 배터리분야에서는 최고의 연구 그룹으로 인정받고 있다.
“기술의 완성도는 100%만 인정을 받습니다. 98%의 완성도는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극복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100%의 완성도를 갖추기 위해서 꼭 필요한 2%의 기술이 바로 핵심기술이고 노하우입니다”
경영도 영업에 대한 경험은 부족했지만 기술에 대한 경험과 노하우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다는 천 대표는 그 기술이 결국은 미섬시스텍의 내일을 만들어 가는 힘이라고 설명한다. ㈜미섬시스텍의 기술력은 이미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일본, 중국, 홍콩 등으로 수출로 2년 연속 수출 100만 불을 달성했으며, 2014년에는 미국과 유럽, 인도로 시장을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죽는 것만 빼고 모든 경험은 도움이 된다
미섬시스텍 천 대표의 지난 경력은 기계로 시작해, 전자, 제어, 전기의 영역을 넘나드는 ‘다양’을 넘어 ‘광범위’ 할 정도이다. 한 가지 분야만 파고들어도 성공하기 어렵다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천 대표의 이력이 이해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천 대표는 이 모든 과정을 ‘경험’이라 말한다.
“내가 집중할 한 가지를 선택하기 이 전에 가능한 다양한 경험을 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저는 30대 까지는 무조건 많은 경험을 하고, 40대에 그 경험을 하나로 모아 한 가지에 매진한다면 경험이 노하우가 돼 성공의 기반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먼저 부딪혀 본다는 천 대표. 그의 좌우명도 ‘단순무식’이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한번 신중히 내린 결정은 무식하리만큼 강력하게 추진한다는 의미인데, 이는 그가 지나온 시간에도 그대로 녹아있다. 신입사원으로 세 번의 직장에 입사를 했고, 맡은 일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책임을 다했다. 이론적 바탕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는 대학에 진학했고, 대학에서는 학업에 최선을 다했다. 그의 20대는 새로움의 연속이었고, 그의 30대의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40대. 그는 지난 경험을 재산으로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시작이라 이야기 한다.
“미섬시스텍은 이제 기술연구소만 갖춘 셈입니다. 내년 사옥이 완공되면 본격적인 생산라인이 구성이 될 것입니다. 그간 개발해 온 기술들이 제품으로 탄생해 세계시
장에서 인정받는 모습을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쉼 없이 달려온 인생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천 대표는 “나처럼 되지 말라”는 당부를 남겼다. 왜 숙제를 해야 하는지 몰라 숙제를 하지 않았고, 그저 동료에게 지기싫어 공부를 했던 고등학교 시절, 일찍 취업에 성공하면서 진지하게 인생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없었던 그의 10대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었다.
“무엇을 하던 목표를 가지고 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공부든 기술이든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한 목적과 방향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무엇이 하고 싶다면 그것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