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업이 침체기로 들어서자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고충을 겪고 있다. 협력업체로 부르는 이들 중소기업들은 대부분 인력이 수 명에서 수십 명 수준에 불과할 만큼 영세하고, 매출도 완제품 생산업체의 발주 물량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발주가 끊기면 언제라도 생존이 위태로워 질 수 있다. 어렵지만 자립의 발판은 중소기업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고통스러운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해나간다면 과거에 비해 더 많은 기회를 창출해 낼 수 있다. 자유무역협정(FTA)은 위기의 중공업이 성장의 기회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
경남 의령군에 소재한 X사는 중장비에 들어가는 부품인 기어박스를 생산해 판매하는 기업이다. 최대 호황기였던 지난 2008년 6월 설립했을 때만해도 일감이 넘쳐났기 때문에 신설기업이었지만 물량 수주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불과 3개월 후 미국에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는 중공업 업황 몰락의 ‘예고편’이었다. 중공업은 발주처의 오더를 받아야 생산하는 구조이고, 대기업인 원청업체들은 성수기일 때에는 통상 3년 치 물량을 확보하고 생산 활동 및 협력업체 발주 계획을 짜는 것이 관행이었기 때문에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다고 당장의 생산 활동에는 큰 영향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원청업체들의 수주물량 확보가 어려워지면서 생산 규모를 줄이기 시작했고, 이러다 보니 X사와 같은 중소 협력업체들에게 돌아오는 일감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특히, 자금난을 이기지 못한 대규모 원청업체들이 부도로 무너지면서 그 원청업체의 협력업체들이 연쇄 부도를 겪는 사례도 늘어났다.
이런 상황을 눈앞에서 지켜본 X사는 어떻게 해서든지 거래처 다변화를 이뤄내야겠다고 다짐했다. 따라서 설립 초기부터 해외시장 진출을 타진했다.
하지만 해외 마케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어박스’는 구동축을 회전시키는데 필요한 동력을 전달하기 위한 각종 기어가 내장되어 있는 박스다. 구동과 관련된 부품들을 모아 조립한 작은 완제품 즉 ‘모듈’이라 보면 된다. 모듈화 된 부품을 사용하면 완제품을 생산할 때 부품 수가 그만큼 줄어 생산에 투입되는 시간과 비용이 줄어들며, 중장비를 갖고 작업을 하다가 고장이 났을 때, 작동이 안 되는 모듈을 빼낸 뒤 새 모듈을 끼워주면 되므로 정비 및 사고처리도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단점은, 가격이 비싸다는 것이다. 이 같은 단점은 해외 마케팅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생산설비와 기술력을 통해 품질에 있어서는 경쟁사보다 좋다고 자신했고, 수입자들도 이 점만큼은 인정했지만 가격이 발목을 잡았다.
절망의 시기에 만난 FTA, 희망을 이야기하다
희망과 절망의 교차가 반복되는 가운데 2011년 태국 바이어와 계약을 체결했고 수출에 성공했다. 한 번 수출이 되니 태국으로 지속적인 수출을 할 수 있게 됐다. 2013년에는 트랙터용 기어박스 생산을 시작해 역시 수출을 했다.
내수 부진을 수출로 메우며 점점 성장 곡선을 올리려고 하던 X사는 또 다시 벽에 부딪쳤다. 2014년 글로벌 중장비 시장 위축의 영향으로 내수와 수출 모두 매출이 급락한 것이다. 중국으로 새로운 수출 계약을 체결했지만 회사 사정을 넉넉하게 해줄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해 연간 수출액은 30만 달러로 2013년 100만6천 달러 대비 70.1% 급감했고, 수출 비중이 크기 때문에 매출도 급락해 14억 원을 올리는 데 그쳤다.
모든 기업들이 어려웠으니 어쩔 수 없다는 무거운 분위기가 지배한 그때, 길이 열렸다. 그동안 거래 관계를 유지해 왔던 태국 바이어가 FTA 원산지증명서, 일명 ‘AK FORM’ 발급을 요청하면서 X사로부터 추가적인 수입을 하겠다고 알려온 것이다. 2007년 6월 1일부터 한-아세안 FTA가 발효됐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X사 직원들 누구도 FTA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고 있지 못 했다. FTA 원산지증명서는 당연히 생소한 단어였다.
X사는 경남FTA활용지원센터에 컨설팅을 요청했다. 상담 관세사가 X사를 방문해 임직원들에게 FTA의 기본적인 지식을 설명해 주면서 FTA 원산지증명서는 기업이 FTA를 활용하는 핵심이니 반드시 숙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태국 바이어가 요청한 ‘AK FORM’은 한-아세안 FTA협정상 특혜관세 적용을 위한 원산지증명서다. 한-아세안 FTA에서 FTA 원산지증명서는 기관발급제이며 통일증명서식인 AK FORM으로만 제출토록 하고 있다.
원산지증명서는 한-아세안 FTA 협정에서 규정하고 있는 원산지결정기준을 충족한 경우에 한해 발급이 가능하며, 세관과 상공회의소에서 발급받을 수 있다. 발급을 위해서는 회사가 수출하고자 하는 물품의 HS코드(세번)에 따라 당해 협정에서 규정하고 있는 원산지 결정기준(세번변경기준 또는 부가가치기준)에 따라 당해 기준을 충족하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세번변경기준일 경우 원재료구입명세서, 자재명세서(BOM), 재고수불부(원재료 및 제품), 생산공정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원산지를 판정하기 위해서는 원산지(포괄)확인서도 준비해야 하는데, 이는 국내에서 수출자가 매입한 원재료에 대해 그 원재료의 원산지 확인을 위해 원재료를 공급한 협력업체가 당해 공급하는 물품의 원산지를 확인해 주는 서류다. 원산지소명서는 수출물품에 대해 FTA 원산지 결정기준을 충족하는 근거를 설명하는 소명자료이다.
기어박스(HS코드 848340)의 원산지결정기준은 한-아세안 FTA의 공통 기준인 ‘CTH or RVC 40%’이다. 이는 4단위 세번변경기준(수입원료를 사용해 제품을 생산한 경우 수입원료의 세번과 제품의 세번이 일정 단위, 즉 첫 4단위 또는 그 이상이 변경되어야 원산지를 인정)이나 수입 원료를 사용해 제품을 생산할 경우 가공과정에서 일정 수준(40%) 이상의 부가가치가 역내(국내)에서 발생해야만 원산지 제품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두 가지 기준 중 하나만 충족시키면 ‘한국산 또는 역내산’으로 인정받아 원산지 결정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다.
원산지증명서 발급 후 끊겼던 수주 밀려
상담 관세사의 도움으로 회사 제품에 대한 원산지 판정 작업을 진행한 결과, X사의 기어박스는 한-아세안 FTA원산지 결정기준을 충족시켰다. 관련 서류를 준비해 상공회의소를 찾아가 FTA 원산지증명서를 발급받게 됐고, 이를 태국 바이어에게 전달했다.
FTA 원산지증명서를 받은 태국 바이어는 5%인 기어박스의 수입관세를 물지 않아도 됐다. 정확히 말하면 태국 부가가치세 절감분까지 포함해 총 5.35%의 세금 절감효과를 보게 된 것이다.
FTA 원산지증명서를 발급할 수 있다는 소식이 퍼지자 태국에서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는 바이어가 관세절감분만큼 제품 가격을 인하하거나 이익으로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X사로선 가격경쟁력이 그만큼 강화된 셈이다. 어려움 와중에서도 X사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됐다.
2015년에는 FTA를 활용한 수출 증가 성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2015년 8월말 기준 X사의 수출액은 36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80% 증가했다. X사는 수출 비중이 매우 높아 매출도 수출에 그대로 영향을 받는데 2015년 8월까지 2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해 전년 동기 대비 100% 증가했다. 2014년 연간 실적 14억 원을 4개월 앞서 넘어선 것이다. 중공업 업계에게 있어 2015년은 전년보다 더 고통스러운 해로 대부분 업체들의 경영수지가 마이너스를 기록했음을 감안할 때 X사의 선전은 의미가 있다.
또한 FTA 원산지증명서 발급으로 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을 확보한 결과, 태국 수입업체 수가 기존 2개사에서 2015년에 4개사로 늘었다. 수입업체의 증가는 수출 주문량의 변동성을 줄이는 데 도움을 주어 안정적 물품 생산이 가능하게 됐다.
FTA 원산지증명서 발급을 통한 수입자의 협정세율 적용에 자신감을 갖게 된 X사는 향후 수입자와의 계약 단계에서 FTA 협정세율을 적용한 수입자의 수입관세 절감 규모를 검토한 뒤 이를 수입자에게 알려 계약을 진행하기로 하는 등 FTA를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활용키로 했다. 또한 한국과 FTA를 체결한 국가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수출국가와 바이어 발굴을 진행하고 있다.
X사의 경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해외시장 개척에 적극적으로 나선 점, 이러한 과정에서 수입자의 FTA 발급 요청에 최고경영자(CEO)가 FTA를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적극적으로 대응했다는 점이 성공요인으로 꼽힌다. 이는 불황 속에서도 분명히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있으며, FTA가 해결방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자료지원 : 한국무역협회 FTA종합지원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