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에너지 대전환의 성공은 이제 발전소나 송전망 건설이 아닌, 프로젝트 전 단계에 걸쳐 파편처럼 흩어진 데이터를 어떻게 하나의 연속체로 묶어내느냐에 달렸다는 업계 전문가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엑셀과 PDF 파일로 데이터를 관리하는 수십 년 된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진정한 디지털 혁신도, 에너지 전환도 불가능하다는 경고가 나온다.
벤틀리시스템즈가 주최한 ‘2025 Year in Infrastructure and Going Digital Awards(YII 2025)’의 ‘에너지 생산’ 세션에서는 디지털 기술이 글로벌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가 펼쳐졌다.
“파일 변환 아닌 데이터 연속성”
맥더멋의 바심 칸 수석부사장은 에너지 프로젝트의 디지털 전환이 단순 문서 디지털화에 그쳐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엑셀, PDF, 워드로 데이터를 관리하는 것을 흔히 ‘디지털’이라 부르지만, 이는 수십 년 전 방식의 형태만 바뀐 것”이라는 진단이다.
칸 부사장은 “진정한 디지털 혁신은 프로젝트 전 단계를 하나의 ‘데이터 연속체(digital continuum)’로 연결, 한 번 입력된 정보가 설계부터 시공, 운영까지 일관되게 활용되는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캐나다 에너지 프로젝트 사례를 들면서, 멕시코, 인도, 독일, 중국 등 전 세계 공급망이 연결된 대규모 사업에서 수천 명 인력이 ‘디지털 스레드(Digital Thread)’로 동일한 데이터 환경에서 협업했음을 밝혔다.
그러나 그는 공급망 데이터의 ‘상호운용성 부족(interoperability gap)’을 과제로 꼽았다. “공급업체 간 데이터 교환이 여전히 수동적이고 비효율적”이라며 “실질적인 데이터 연동 체계 확립이 업계의 과제”라고 덧붙였다.
지열부터 원자력까지… 산업별 디지털 혁신 사례
퍼보 에너지의 스티븐 퍼초 매니저는 지열(Geothermal) 프로젝트가 2D 단면 분석에서 4D 모델링으로 전환됐다고 발표했다. 과거 지질 분석은 2D 단면과 단순 지도 기반 모델링에 의존했지만, 현재는 시퀀트(Seequent) ‘리프프로그(Leapfrog)’ 플랫폼으로 3D 및 4D 수준의 지질 모델을 구현 중이라고 했다.
그는 “지열 프로젝트는 수십 개 수평 시추공으로 광범위한 지역을 커버해야 한다”며 “리프프로그의 고해상도 3D 예측 모델 덕분에 시추공의 지질적 리스크를 정밀 관리, 안전성과 경제성을 동시에 높여 더 많은 청정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퍼보 에너지는 이 모델링 기반 접근으로, 기존 오일·가스 산업의 수평 시추 및 수압 파쇄 기술을 재활용하면서 탄소 배출 없는 청정 열에너지 생산 체계 확립에 주력하고 있다.
워리, “디지털 트윈은 복잡성 단순화 도구”
워리의 알베르토 이니에스타 디렉터는 전 세계 대형 에너지 프로젝트에서 디지털 트윈(Digital Twin)의 역할을 설명했다. 약 1천여 개 지속가능성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고 전제한 뒤, 블루·그린 수소 생산, 탄소 포집·저장, 태양광 인프라, 친환경 교통망 구축 등을 예로 들었다.
이 디렉터는 “프로젝트 복잡성 증가로 실시간 데이터 통합과 시각화가 중요해지는데, 디지털 트윈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IT 및 운영 데이터(OT)를 하나의 컨텍스트 안에서 분석함으로써 엔지니어 간 협업과 설계 정확성이 크게 향상된다”고 부연했다. 또한 “디지털 기술은 설계 단계 효율을 넘어 조달·시공 단계 자원 배분 최적화, 현장 문제 조기 탐지, 운영 단계 신뢰성 향상까지 전 주기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덧붙였다.
원자력 분야도 디지털 혁신 가속화
어시스템의 그레이엄 오픈쇼 이사는 원자력 산업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언급했다.
영국 신규 원전 ‘힌클리 포인트 C(Hinkley Point C)’ 프로젝트는 디지털 기술 도입으로 대규모 설계 변경과 규제 대응을 효율적으로 관리한다고 했다.
오픈쇼 이사는 “과거 프로젝트 제어(Project Controls) 부서가 한 달 중 절반 이상을 과거 데이터 분석에 썼지만, 현재는 데이터 기반 예측 분석(Data-driven forecasting)으로 미래 리스크를 예측·대응한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이는 단순 공정관리 개선을 넘어 프로젝트 수행 문화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원자력 분야는 안전성과 규제 준수가 절대적인 만큼 데이터 신뢰성과 추적 가능성이 핵심”이라는 그는 “디지털 시뮬레이션과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 체계는 향후 원전 프로젝트의 필수 요소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자연과 인공 경계를 연결”
세션 후반부, 패널들은 디지털 트윈이 자연환경과 인공구조물 간의 연계(Nature–Built Environment Integration)를 주제로 의견을 나눴다. 바심 칸은 “설계 단계의 공정 모델을 실제 운영 데이터와 결합, 시설의 압력 손실, 부식, 유량 등을 실시간 분석해 운영 효율을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것이야말로 디지털 트윈이 현실 세계 물리적 시스템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이라고 강조했다.
그레이엄 오픈쇼는 개인 산호초 모니터링 프로젝트를 예로 들었다. “해양 생태계 변화를 3D 스캔과 AI 분석으로 추적한다”며 “이는 건설 현장이 주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실시간 파악, 생태계 훼손을 사전에 예방하는 데도 활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에너지 전환 위한 데이터 중심 협업
세션은 디지털 기술이 에너지 전환 복잡성을 단순화하고 지속가능 인프라로의 전환을 가속화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패널들은 공통적으로 데이터 통합, 상호운용성, 실시간 협업을 향후 에너지 산업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꼽으며, 디지털 트윈과 AI 기술이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있음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