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일보]
그렇게 짧은 엔딩 크레딧은 처음이었다. 감독, 연출, 편집에 어떤 AI 툴을 썼는지 보여주는 단 한 화면이 전부였다. 수십 명 스태프의 이름이 흐르던 기존 영화의 관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4일부터 사흘간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AI콘텐츠 페스티벌 2025'의 ‘AI 상영관’ 풍경이다.
상영작은 10분 내외의 짧은 단편 8편으로 구성됐다. 일부 작품에서는 등장인물의 이미지 자체에서 ‘AI 특유의 질감’이 느껴졌고, 또 다른 작품에서는 AI 기반 VFX가 영상을 기괴하면서도 독특한 분위기로 끌어올렸다. 완성도에는 편차가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기존 영화 문법과는 결이 다른 시도가 엿보였다.
관객의 반응은 엇갈렸다. 상영 후 만난 관객 A씨는 “AI가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표현하는 데는 확실히 강점이 있다”고 호평했다. 반면 관객 B씨는 “기술적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서사적 완성도는 아직 아쉽다”고 꼬집었다. 상반된 평가였지만, 현장에서는 두 반응 모두 설득력이 있었다.
천만 영화 ‘명량’, ‘한산’을 연출한 김한민 감독도 이날 현장을 찾았다. 그는 AI 시대의 창작 환경에 대해 “인문학적 사고와 철학적 깊이가 더 절실해진 시대”라고 정의했다.
김 감독은 “결국 AI가 모든 것을 대체하지 않을까 하는 위협을 느낀다”며 창작자의 불안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2014년 ‘명량’이 1,700만 관객을 동원했지만, 사람들은 이제 그런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며 “많은 것이 위기이자 도전인 지금 시대가 두렵기도 하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김 감독은 AI를 전면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날 그는 작업 중인 AI SF 영화 ‘에덴’의 티저 영상을 공개하며 “20년 전부터 구상했던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구현하려면 1,000억 원 이상의 제작비와 막대한 인력이 필요해 시도조차 못 했다”며 “AI 시대가 와서야 비로소 창작의 형상화가 가능해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과거엔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들던 로봇이나 크리처(괴물) CG 작업도, 지금은 책상 위에서 AI 툴 하나로 단기간에 만들 수 있다”고 덧붙였다. 기술이 창작의 문턱을 획기적으로 낮췄다는 것이다.
기술적 실험과 가능성의 이면에는 법적·윤리적 쟁점이 도사리고 있다. 정지우 변호사(문화평론가)는 한국영화진흥위원회 웹매거진 기고를 통해 AI 활용 저작물의 법적 공백을 지적했다.
그는 ‘단순히 프롬프트를 입력해 AI가 자동 생성한 결과물은 저작권을 인정받기 어렵다’고 봤다. 다만 ‘인간이 편집·보완·재구성하는 등 추가적 창작 행위가 개입될 때 비로소 저작물로 보호될 여지가 생긴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한국저작권위원회는 지난 6월 발행한 <생성형 인공지능 활용 저작물의 저작권 등록 안내서>를 통해 ’AI가 자동으로 생성한 산출물에는 저작권이 발생하지 않아 저작권 등록이 불가능하다‘는 해석을 공식적으로 제시한 바 있다. 저작권은 결국 ‘인간의 창작성’을 전제로 한다는 원칙 때문이다.
10초도 안되는 엔딩 크레딧은 AI 영화의 현주소를 상징한다. 제작은 간결해졌고 기술은 비약했지만, 그 안에 담길 ‘이야기’와 ‘책임’의 무게는 가벼워지지 않았다. AI가 영화를 만드는 시대, 그 영화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인간이 답해야 할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