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력산업 저성장' 中에 내줄판
올‘조선 수주 1위’中에 뺏겨… “반도체도 2년내 역전”
“중국의 반도체 기술은 이미 우리를 3~4년 차이까지 쫓아왔습니다. 이런 스피드라면 2년 뒤쯤엔 우리가 앞설 거라고 장담 못합니다.” 반도체 설계회사 텔레칩스의 서민호 사장은 “중국이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인지 한국만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중국의 선전(深?) 연구소의 연구인력을 현재 11명에서 연말까지 30~50명으로 늘릴 예정이다. 한국의 3분의 1 임금 수준에 고급 엔지니어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성과 위주 보수체계는 미국을 뺨친다.
최고급 기술자의 월급이 2만8000위안(약 340만원)에 달해 한국과 비슷한 수준인 반면, 어떤 기술자는 3000-4000위안밖에 못 받는다. 하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는다고 한다. 얼마전 세계 1위 반도체 장비업체인 미국의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스(AMAT)’는 한국에서 연구개발(R&D) 센터를 철수한다고 발표해 충격을 주었다. 대신 중국에 200㎜ 반도체장비 연구 및 생산 시설을 이전할 계획이다. 올해 초엔 인텔이 한국내 R&D 센터를 없애고 중국에 더 큰 규모로 세우겠다고 발표했었다.
지난 10년간 한국 경제의 성장동력 역할을 해준 IT산업. 그 두뇌에 해당되는 연구·개발 근거지가 중국으로 옮겨가는 것은, 역동성을 상실한 우리 경제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잇단 위기론
한국 경제의 자존심이었던 조선도 1-2월 선박 수주량이 중국에 추월당했다. 다른 분야는 말할 것도 없다. 지난해 말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가 중국에 진출한 465개 한국 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한국과 중국의 기술이 동등하거나 오히려 중국이 앞섰다”는 대답이 무려 30% 가까이 나왔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이미 MP3플레이어와 모직(毛織)산업의 경쟁력이 중국에 밀렸고, 2010년에는 디지털TV와 이동통신 장비, 철강도 중국에 뒤질 것으로 전망됐다.
외환위기를 겪은 지 10년. 그동안 한국은 구조조정과 개방의 격랑을 헤쳐왔지만, 이제 다시 경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차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이구택 포스코 회장 등 재계 인사들이 잇달아 위기론을 제기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서울이 몽유병에 걸렸다. 아시아의 수출 챔피언이 길을 잃을 위기에 놓였다”며 한국 제조업이 동력을 잃고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인 샌드위치 신세가 됐다고 분석했다.
무엇보다 경제의 역동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중국은 최근 4년 연속 10% 이상의 고성장을 거듭하는 가운데, 한국은 지난 4년간 잠재성장률(물가를 자극하지 않고 달성 가능한 경제성장률)에도 못 미치는 연 평균 4.2% 성장에 머물렀다.
기업가들이 투자의욕을 잃은 탓에 투자 부진도 심각하다. 96년 GDP(국내총생산)의 15.6%에 이르던 기업 설비투자가 작년엔 11.1%로 떨어졌다.
삼성경제연구소 정문건 전무는 “그동안에도 개혁을 외쳐 왔지만 성장동력은 약화되고 노사갈등만 심화됐다”면서 “총체적인 한국 경제 시스템의 활력 회복을 위한 진정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4대 위기요인
과연 우리 경제의 어떤 모습이 위기인가? 한 조사기관에서 기업인·교수 15명과 국내 주요 대기업 9곳의 기획·전략 담당 임원에게 왜 위기인지 설문조사해 보았다. 응답자들은 ▶경제성장 동력의 상실(67%) ▶중국·일본 사이에 끼인 기술력 샌드위치 상황(38%) ▶정부에 대한 불신 확대(33%) ▶노사대결 심화(29%)의 네 가지를 위기요인으로 꼽았다(복수응답 허용).
이현승 GE에너지코리아 대표이사는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이 수익성과 현금 중시 경영을 하다 보니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는 노력이 없었다”면서 “성장동력은 하루아침에 나오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태식 한양대 공대 교수는 “플랜트산업 등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육성하고 기존 산업 중에서도 고부가가치 산업을 집중 육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사양산업으로 간주되는 가죽제품에도 인건비 비중이 10%도 안 되는 자본·기술 집약적 산업이 있다는 것이다.
강석훈 성신여대 교수는 “샌드위치 위기론이 나오기 이미 10년 전부터 이른바 넛 크래커(nut cracker·호두까기) 경제라고 해서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에 끼인 구조가 문제라는 지적이 나왔지만 지금까지도 극복 전략은 없었다”면서 “10년 전엔 개념적으로 말하던 것이 지금은 현실로 다가왔다는 것이 큰 차이”라고 말했다.
이병남 보스톤컨설팅그룹 서울사무소 대표는 “외환위기 때처럼 정부가 앞장서 전 국민이 경제위기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