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체, 증권업 진출 리스크… 과거 큰 손실 퇴출사례 많아
오너 사금고화등 모럴해저드 가능성… 증권사 대형화ㆍ경쟁력 강화에도 역행
최근 비금융 제조업체들의 증권업 진출이 잇따르고 있다. 내년 자본시장통합법 시행으로 '금융산업 빅뱅'이 기대되는 가운데 국민은행, 기업은행, SC제일은행등 금융사뿐만 아니라 현대자동차, 롯데, 두산, 아주, STX그룹 등 대기업들이 너도 나도 증권사 신설을 천명하고 나섰다. 증권업계 관계자들은 "제조 서비스업체들이 분별없이 증권업에 뛰어드는 것은 국가 경제적으로 손실일 뿐만 아니라 증권사 경쟁력 강화와 대형화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걱정하고 있다. 현대그룹의 현대투신증권, LG그룹의 LG투자증권 등 제조업 기반 재벌그룹들이 증권업에서 막대한 손실과 공적자금 투입을 유발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 제조업과 증권업은 체질이 다르다
= 한때 증권업계에서 인재 산실로 통하던 A증권 임원들은 사장 주재 임원회의가 '공포의 시간'이었다. 사전 예고 없이 어느날 갑자기 회의장 출입을 막는 것으로 해고 통보를 했기 때문.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70ㆍ80년대 제조업체의 '군대식 조직문화' 때문이었다.
A증권은 비전문가인 오너 2세 경영체제와 무리한 부동산투자, 증권업 특성을 무시한 조직 운영 끝에 외환위기 때 문을 닫고 만다.
옛 신동방그룹이 홍콩계 페레그린과 공동으로 세웠던 동방페레그린증권은 모기업과 사돈관계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관리 스캔들에 휘말렸다가 경영권을 넘겨야 했다.
신동방그룹은 결국 증권업 부실로 경영난이 가속화되면서 경영권이 넘어가 현 사조그룹에 합병됐다.
원양어업사인 고려통상이 세운 고려증권 역시 2세 경영체제 한계로 외환위기 때 문을 닫았다.
30여 년 동안 증권업계 흥망을 목격해 온 김명기 전 증권업협회 상무는 "증권업에 진출했다가 실패한 대기업의 가장 큰 문제는 증권사를 독립 사업 영역이 아니라 모기업 '액세서리' 정도로 여기는 마인드"라고 지적했다.
김 전 상무는 "변화가 빠르고 전문 인력 의존도가 높은 증권업은 확고한 경영 철학과 집중력 없이는 해낼 수 없다"며 "증권업에 진출한 제조업체들이 대부분 증권사를 사(私)금고로 삼거나 오너의 아들, 사위 등을 최고경영자에 앉혀 족벌체제로 운영하다가 실패했다"고 말했다.
증권업 경영 경험이 없는 대기업이 자본력을 과신하고 무리하게 뛰어든 것도 실패 요인이다.
현대그룹은 국민투신과 함께 부실투성이인 한남투신을 인수해 현대투신을 세워 고전하다가 브로커리지 영업 시작과 함께 현대투신증권으로 사명을 변경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외환위기 여파로 2003년 푸르덴셜에 헐값 매각하고 말았다.
◆ 제조업체 증권업 진출 이유
= 제조업 기반 대기업들이 '비전공 분야'인 증권업에 욕심을 내는 이유는 뭘까.
한 증권사 임원은 첫째 여유 자금이 있어도 본업에서는 마땅한 투자처가 없다는 점, 둘째 증권사가 있는 것이 인수ㆍ합병(M&A) 등 고부가가치 수익사업에 유리하다는 것, 셋째 오너 2세에 대한 증여 상속 등 세금문제를 해결하는 데 유리한 측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한 마디로 증권업에 대해 뚜렷한 경영 철학이나 비전없이 돈 될 만한 투자처를 찾다보니 증권업 진출을 고려하게 됐다는 것이다.
증권사 한 애널리스트는 "다른 업종과 달리 최고경영자의 전문성과 자율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데다 제조업체 영업 사이클에 따른 수익 창출을 재촉하는 것도 과거 실패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모그룹 해체에도 업계 상위권을 지키고 있는 대우증권은 출범 당시 김우중 당시 대우 회장이 증권업 육성에 확고한 의지를 가졌다는 점이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대우증권은 당시 업계 1위 삼보증권과 2위 동양증권을 합병해 출발하면서 대형화를 이룰 수 있었고, 김창희 초대 사장이 15년 동안 경영권을 행사하면서 모그룹에서 자율성을 보장받았다.
◆ 리스크 요인 너무 많다
= 제조업체들의 증권사 운영에서 또 하나 고려해야 할 리스크는 제조업체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인건비다.
산업은행이 설립했던 산업증권은 당시 증권업계 최고 대우를 표방하면서 기존 증권 인력보다 2~3배 높은 급여를 지급했다.
그러나 전문성 없는 은행 임직원들을 증권사 요직에 배치하면서 영업상품 개발 등 다른 증권사와 경쟁에 밀려 수익을 내지 못하는 가운데 과도한 임금 부담을 견디지 못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통계청이 집계한 작년 업종별 월평균 기본 급여는 증권업이 388만9000원으로 130만9000원인 소매업의 3배 가깝게 높고, 312만7000원인 자동차제조업보다도 월등히 높은 수준으로 나타났다.
애초 증권업에 대한 이해와 의지없이 출발한 대기업 오너가 모럴해저드에 쉽게 빠지게 된다는 것도 리스크 요인이다. IMF 당시 제조업체들이 보유하고 있던 증권사들이 줄줄이 쓰러진 직접적인 원인은 무리한 지급보증에 있다.
지금은 증권사의 신용공여와 지급보증이 차단됐지만 과거 대주주인 모기업들은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끌어다 쓰면서 관행적으로 계열 증권사들에 지급보증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계열사에 대한 지급보증이 문제가 되겠다 싶으면 A그룹 증권사와 B그룹 증권사가 상호 합의 하에 상대방 계열사 지급보증을 서주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금감원은 증권업 인가 심사과정에서 자본금과 인적, 물적 요건과 함께 '대주주 적격성 요건'도 꼼꼼히 따지겠다고 밝혀 제조업체들의 증권업 진출 움직임이 어떻게 귀결될지 주목된다.
금융업 영위 경험 등 증권업 영위에 필요한 지식과 경험, 사회적 평판, 전문 인력 육성과 새로운 금융상품 개발 등에 대한 장기 비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하겠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