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70대 실향민의 애끓는 사모곡, 네티즌 심금 울려
북두칠성을 따라 46년 만에 온 어머님 편지
26일부터 10월 1일까지 금강산에서 열리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맞아 한 실향민의 사연이 네티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1937년생으로 현재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 살고 있는 이세철 씨가 쓴 편지가 그것. 그 내용을 소개한다.<편집자 주>
현실의 지구촌은 모든 과학적인 수단을 동원해 우주 탐사선이 달에 착륙했다가 이륙하여 지구로 귀환하는 초스피드 과학 시대이다.
그런데 어머님의 편지가 아들인 나에게 도착하기까지 약 55일이 걸렸다. 그 기간 동안 쉬임없이 서, 동, 북, 남쪽을 따라 배달되어 온 것이다. 북한의 평안남도에서 함경남북도를 경유하여 두만강을 건너 중국의 도문에 거주하는 조선족 수취인까지 약 40여 일 걸려서 배달되었다. 도문에서 다시 한국의 나에게 15일이 소요되었다.
북한의 통신원(집배원)이 주소지의 방향을 몰라 북두칠성 자리를 따라오느라고 그렇게 시간이 걸린 것인지 참으로 한탄스럽다. 같은 땅에서 3~4일이면 배달될 수 있는 것인데, 그렇지 못한 기이한 현실을 누구에게 탄원해야 할까! 밝은 달에서 방아를 찧던 토끼가 우주탐사선의 달 착륙을 만류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되는데…
그런데 이 편지가 어머님의 유언장이 될 줄이야!
철부지 아들의 나이 17세 때, 함경남도 고향 읍내의 하늘은 청명했다. 그 하늘에 느닷없이 번쩍이는 불빛과 포성이 울리더니 쌕쌕이가 날아와 읍내 여러 곳에 폭격을 하였다. 그리고 남조선을 해방한다던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국방군이 읍내에 입성하였다. 전쟁의 기운이 가라앉은 읍내는 폭탄 구덩이나 소방서 우물에서 시체를 찾아내며 통곡하는 가족들의 울음소리로 비참한 비극을 실감케 하는 현장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읍내 사람들의 인심은 차츰 안정되어 가는 듯 하였으나 얼마가지 못했다. 보따리를 지고 이고 어린것들을 끌다시피 종종 걸음의 행렬이 남쪽을 밀려 나갔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방군이 작전상 후퇴를 한다는 것이다.
불구의 남편을 두고 떠나지 못하는 어머님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 철부지 아들에게 ‘석 달만 피란 갔다 오라며 다른 집 아들하고는 다르다’고 저고리 옷고름으로 눈물을 훔치던 어머님을 뒤로 하고 기약 없는 피란길에 나섰다. 그때 읍내에는 미군의 원폭설이 떠돌아다녔다.
방안에 앉아 계신 아버님께 피란 갔다 오겠노라고 제대로 절도 올리지 못했음이 내내 나의 가슴을 긁고 있다. 외톨이의 피란생활은 허전함과 부모형제들의 그리움을 참고 견디기 힘들어 북녘 고향 하늘을 바라보면서 울부짖었던 세월이 어느덧 30여 년이 흘렀다. 17세였던 나의 머리에도 흰머리카락이 덮였다.
나의 용단으로 직장을 명예퇴직하고 기다려 주시지 못할 부모님의 생사와 동생들의 소식을 알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섰다. 조선족과 고향 선배의 일본인 동창생을 연계하여 2년 만에 중국의 조선족으로부터 고향 소식이 왔다는 전갈을 받았다. 설레는 가슴을 안고 초면부지의 땅을 향해 중국민항에 탑승하였다. 대련, 심양, 연길을 경유하여 도문이라는 곳에 있는 조선족의 집으로 갔다.
그곳에는 북한 어투의 사투리로 말하는 젊은이가 나에게 고향과 어머님에 대하여 묻고는 어머님께서 1996년도에 찍었다는 사진을 건네주었다.
사진을 보는 순간 땅속 깊이 꺼지는 듯한 허탈한 감정이 솟구쳤다. 사진의 노파는 초췌하여 전혀 어머님의 모습이라고 보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수상한 세월이 40여 년을 흘렀더라도 아들이 어머님을 몰라볼 수가 있다니. 어머님이 아니라고 나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젊은이가 또 한 장의 사진을 건네주었다.
1958년에 찍은 가족 전체의 사진이었다. 크게 자란 옥수수를 배경으로 아버님, 어머님과 첫째 둘째 여동생의 모습도 찍혀 있었다. 그리고 초면부지 셋째 여동생과 막내 남동생의 모습도 찍혀 있었다.
순간 나는 한없이 소리 내어 울었다. 서글픔에 떨고 있는 몸을 가누지 못해서 옆에 있던 조선족이 나를 눕혔다. 궁핍한 환경에서 생의 연장이 어머님을 초라하게 늙도록 만들어 아들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변형시켰다. 사진 속 어머님을 알아보지 못한 일이 죄스러웠다. 철부지 아들은 하늘을 쳐다보기가 부끄러웠다.
사진을 가지고 온 젊은이가 어머님을 이곳까지 데리고 올 테니 기다리라고 하면서 수고비를 달라고 했다. 수고비를 건네주고 낯선 도문에서 어머님을 생전에 만나 볼 수 있다는 부푼 기대로 27일간 기다렸다. 그러나 소식이 없었다. 허탈해진 가슴을 안고 귀국을 하게 되었다. 그 후에 ‘차비가 없어서 어머님께서 못 오셨다.’ 고 사진을 나에게 건네주던 젊은이가 변명을 하였다. 돈 탓이란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일본에서도 전갈이 왔다.
나는 즉시 초행인 일본행 비행기에 탑승하여 동경 신주쿠에 있는 집으로 안내되었다. 수소문하여 부모형제들의 소식이 담긴 편지를 받았다. 나는 가슴이 뭉클해서 편지 개봉을 잠시 망설였다.
편지 첫머리에는 내가 피란 후 고향 읍내에는 무차별 폭격이 있었다고 했다. 혹한의 추위에 눈이 무릎까지 덮는 산골길을 어머님은 만삭의 몸으로 불구 남편과 어린 딸, 이불 봇짐을 실은 리어카를 앞에서 끌고, 큰딸은 뒤에서 밀며 읍내 동쪽 산계곡인 ‘동돗세골안’에 움막을 세우고 그곳에서 피란생활을 하며 춥고 배고픔을 견뎠다고 했다.
‘얼마나 큰아들의 빈자리가 허전했을까?’
차츰 움막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어머님께서는 셋째 딸을 순산하셨고, 고달픈 생활을 견디어 내는 것만이 불구 아버지와 어머님의 삶의 전부였다고 한다.
어린것들과 생의 연명을 해야 하는 아버님께서는 양화 제조 기술로 방안에서 쭉구를 만들고, 어머님은 함지에 쭉구를 담아 머리에 이고 폭격을 피해 행상을 하며 끈질긴 삶을 지탱해 나갔다고 했다. 당시 읍내에는 생필품 제조라는 말조차 듣기 어려운 그곳에서 쭉구가 호구지책이었다.
시간의 흐름이 참혹한 동족상쟁을 휴전까지 이끌고 갔고, 부모님은 폐허가 된 집터에 움막집을 세우고 삶의 여력을 이어나갔다고 했다. 가족이 한자리에 모일 때는 집 떠난 아들의 안부가 궁금하고 걱정스러워 어머님께서 항시 눈시울을 적셨다고 했다.
고된 삶에서도 늦둥이 아들을 출산하여 큰아들의 빈자리를 채웠고, 늦둥이를 보시며 흐뭇해하시던 아버님의 얼굴에 병색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버님은 반평생을 불구로 앉아서 삶의 모든 것을 처리하다 보니 엉덩이의 욕창이 심하여 하지의 마비가 왔고, 병마가 몸 전체로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강인한 아버님께서도 병마를 앞세운 저승사자를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아버님은 1963년 8월 10일 우여곡절과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셨던 것이다.
아버님(李洪洙)은 52년 생애 (1911년 4월 1일-1963년 8월 10일) 중 29년을 교통사고로 불구의 몸으로 지내셨다. 험난한 삶의 세파 속에서도 강인한 의지와 부단한 노력이 남달리 투철했던 분으로서 뭇사람들에게 진솔한 삶의 표본을 남기셨다고 고향사람들은 말하였다.
책 속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강철은 불속에서 단련되고 그 강철은 불속에서 녹는다.’
아버님은 병상에서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까지 큰아들을 찾느라 끝내 눈을 감지 못했다고 한다. 못난 아들의 불효막심한 죄를 일생 내내 속죄한다 해도 다하지 못함에 억장이 무너진다.
남편을 여읜 어머님께서는 첫째 딸, 둘째 딸을 강원도로 출가시키고, 셋째 딸이 출가한 평안남도로 어린 아들을 데리고 이주하셨다고 한다. 셋째 딸의 보살핌을 받아가면서 막내아들을 성장시켜 장가도 보내고, 며느리와 손자들도 보았으니 삶의 고달픈 파도가 잠들었다고 한다.
동봉한 한 장의 사진에는 어머님께서 회갑 잔칫상을 받은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회 만수무강 갑’이라는 글이 붙여진 마당 한쪽에 차려진 잔칫상 위에는 조촐하게 음식이 차려 있고, 막내아들의 술잔을 받은 어머님의 모습은 서글프고 무표정했다. 금세 울음이라도 터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진 속 어머님께, 마음속에서 올리는 큰아들의 잔을 받아주시라고 흐느꼈다.
나는 동경의 신주쿠 거리를 급히 돌아다녔다. ‘아끼하바라’ 시장의 전자상가에서 텔레비전(북한에서 시청 가능한)을 구입하여 북한 어머님 주소지로 발송하고 조총련계열의 ‘족립금융’에서 미화를 송금하였다.
그리고 한국에서 준비해 간 어머님의 겨울용 의류와 나의 두 딸이 손녀로서 처음으로 불러보는 할머님께 쓴 편지와 금반지 등 선물과 가족사진, 외롭게 살아온 기나긴 아들의 사연이 담긴 편지를 소포 속에 넣어 신주쿠 우체국에서 발송했다. 흐뭇하고 뿌듯한 감정이 나를 들뜨게 하였다. 하지만 들뜸도 잠시 우체국 직원의 말로는 일본에서 발송한 소포가 중국 북경을 경유해서 북한으로 배달되기까지 석 달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귀국 비행기에 탑승한 나의 마음은 개운치 못했다.
북한 고향땅에 계신 부모형제에게 연결되는 모든 것이 여의치 못했다. 나의 인생이 초로에 접어든 오늘에도 개운치 못한 것이 어떤 원한의 꼬리라도 달린 것 같다.
1996년 9월에 어머님은 철부지 아들이 아닌 70세 가까운 큰아들에게 손자의 대필로 편지를 보내 주셨다.
애련 애비 보아라!
그간 별고 없는지? 여기는 다 무사하다.
오늘은 어쩐지 집에 앉아 있자니 고향 생각이 더 나고 또 테레비를 보노라니 고향을 찾아오고 부모형제를 찾아 조국으로 오는 장면들이 나오니 너의 생각이 자꾸 떠올라 못 견디게 그립구나. 그래서 학교 갔다 온 손주 손을 빌어 너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생각나는 대로 순서 없이 쓴다.
네가 보내 준 편지는 문섭 애비가 읽어주어 보군 한다. 네가 애비 에미와 동생들을 찾느라고 애갈진 탓에 병들지 않았는지? 문섭 애비는 나에게 편지를 읽으면서 수술을 하였다고, 나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손주들이 읽어주는 것을 듣고 탈이 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구나! 정말 걱정이 된다. 무엇 때문에 수술을 하였는지? 아프지는 않은지? 인제 다 나았는지? 정말 걱정이 되는구나.
에미 걱정일랑 동생들 걱정일랑 너무하지 말아라. 동생들은 너의 말을 명심하고 열심히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애련 애비야!
딸들보다 아들이다. 문섭 애비 같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 아들이라서 그러는지는 모르겠다만 에미에 대하여 효성이 지극하다. 내가 지금껏 오래 사는 것도 문섭 애비의 효성이 지극한데서 내가 사는 것 같다. 이웃에서랑 공장에서랑 공구 반장 같은 사람은 없다고 보는 사람마다 찾아오는 사람마다 이야기한다. 그러니 내 걱정은 말아라.
내가 죽은 다음에도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동생 문섭 애비를 잘 생각해 주고 힘껏 돌봐 주어라. 꼭 부탁한다.
애련 애비야!
네가 보내 준 겨울옷과 여름옷을 입고 있다. 더러는 이 다음 죽을 때 입고 가려고 꽁꽁 묶어 놓았다. 문섭 애비랑 자꾸 입으라는 것 입지 않고 있다. 내 죽기 전에 너한테 지난날 고생하며 살아온 이야기를 하자면 소설책을 써도 다 쓸 것 같지 못하구나. 너야 잘 알 텐데, 너와 에미가 얼마나 어렵게 살아왔는지, 너의 동생들이 있었던 일들을 다 쓰자면 말이 없을 것 같다.
복자는 네가 떠난 다음 아버지와 에미의 속을 얼마나 썩혔는지 너는 다는 모를 거다. 또 알 수도 없지. 환갑이 다 되어오는 오늘까지도 에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지 못하고 있구나. 동생 복순이를 강원도에 데려다 형제끼리 의지하고 싶다고 그곳에 시집을 주었더니, 지금껏 에미한테 편지 한 장 없었다가 최근에 와서 한두 장 편지 온다.
마음이 어진 복순이는 에미를 생각해서 편지를 자주 보내고 에미를 만나려 이곳에 올 때면 바른 사림이지만 옷이라도 한 가지씩 해가지고 오군 한다. 이웃에 사는 복희도 자주 와 음식이랑 해가지고 오고 약도 구해서 보내주곤 한다.
네 동생들 이야기한다 해서 나무람 말아라. 문섭 애비는 다 쓴 편지를 보고 형님한테 무슨 편지를 그렇게 썼느냐고? 이야기하는 것을 네 형이 맏자식이기 때문에 동생들의 일을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앞으로 동생 복자에게 편지할 때는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아라.
애련 애비야!
정말 과거에 있었던 일들과 지금껏 살아온 일들을 그 누구에게 이야기하겠니? 정말 너를 생각하면 눈물만 앞서는구나. 타향에서 홀로 살아오자니 눈물 또한 얼마나 흘려야 너를 만나보겠는지! 인제 나이가 많다 보니 지나온 일들도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는구나. 순서 없이 손주에게 불러주었는데 제대로 썼는지 모르겠구나?
애련 애비야!
에미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 말아라. 문섭 애비가 있지 않느냐! 그러니 병치료를 잘 하여라. 애련 에미의 병치료도 잘 하여라. 애련아, 애라야, 너희들이 보내 준 반지랑 잘 받았다. 할머니는 기쁘다. 할머니는 너희들에게 고맙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구나! 너희들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잘 돌보아라. 부탁한다.
애련 애비야!
병이 하루빨리 낫기를 바란다. 애련 애비야, 앓지 말어라. 빈다. 꼭 완치되기 바란다. 서로 만날 때까지 앓지 말어라. 나도 마음 굳게 먹고 있다. 앞으로 자주자주 편지나 전해다오. 너의 편지가 오는 날이면 밥맛도 더 있고 기분도 좋다. 통신원만 기다린다.
동생들이 남양에 가겠다고 하는데 그때 얼굴이라도 서로 보았으면 얼마나 좋겠니? 중국에서 만나는 문제는 힘이 많이 들 것 같다. 앓지 말어라.
- 어머니로부터 1996년 9월 12일 -
96년도 초겨울이었다.
중국 도문의 조선족으로부터 어머님께서 사망했다는 전갈이 왔다. 그 소식을 듣고 어머님의 편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내가 남긴 유언장이 되었다. 허망하고 원통함이 그리고 공허해진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머님은 1996년 11월 30일 막내아들의 품에서 한 많은 세상을 하직했다. 어머님(梁貞金)은 생애 78년(1917년 5월 7일 - 1996년 11월 30일) 중 불구자 남편과 29년, 홀로 31년을 기구한 운명 속에서 삶을 이어오셨다.
경기용 자전거 주행연습 중 교통사고로 하지가 마비된 남자와 결혼을 앞둔 어머님에게 친지와 이웃들은 결혼을 만류하였었다. 만류에도 불구하고 시집와서 한 맺힌 인고의 삶을 지탱하시던 어머님은 고향사람들로부터 미인 열녀라는 칭송을 받았다.
‘어머님은 험난했던 삶의 세파 속에서 수모와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애정으로 감싸고 견디어낸 뭇 여인네들의 표상이다’라고 철부지 아들이 서슴없이 하늘에 외쳐본다!
나는 고향에서 보내 온 가족사진 속 부모님 옆에 고향에서 중학생 차림으로 친구들과 같이 찍었던 사진 속의 나를 오려내어 가족사진에 접목하였다. 가족과 같이 찍었던 것처럼 사진을 확대 인화하였다. 인화한 가족사진을 내 책상 앞에 두고 매일 마음속으로나마 볼 수 있기를 바랬다.
또 가족사진 중 아버님 어머님의 얼굴만을 복사 확대 인화하여 나름대로 불효를 속죄하는 뜻에서 큰 액자에 넣어 서재의 중앙 벽에 모셔드리고 엎드려 빌었다. 철부지였던 아들놈을 영혼 속에서라서 막심한 불효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자랑스럽고 애타게 그리운 나의 부모님 영전에 엎드려 사죄를 빌며 이글을 부모님 영전에 올립니다.
그 어느 문필가가 내 부모님의 인고의 삶을 적절히 표현하고 그 삶의 진가를 평가할 수 있을까요. 이 글을 마무리하려니 무딘 펜으로 표현함에 이성을 잃은 듯한 감정과 갈등으로 적절치 못함에 독자들의 너그러운 이해로서 읽어주시길 빕니다.
* 주 : 재북 동생들과 딸들의 이름은 익명표기임.
쭉구 : 껍데기는 두꺼운 포장 천으로 만들고 바닥은 자전거 타이어로 만든 신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