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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생각하는 ‘나만의 기술’
안영건 기자|ayk2876@kid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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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생각하는 ‘나만의 기술’

(주)금성침대 고중환 대표, 구조체 전문 기술자 21건 특허 보유

기사입력 2014-04-29 11:3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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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일보]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은 여든 다섯 번째 이달의 기능한국인으로 ㈜금성침대 고중환(60)대표를 선정했다. 고중환 대표는 중학교를 졸업한 1971년, 침대회사의 기능공으로 침대와의 인연을 시작해 지금까지 40여 년간 한 길을 걸어온 침대 매트리스 및 구조체 전문 기술자다. 침대 매트리스의 스프링연결 클립개발, 4면 지퍼 매트리스, 체압 분포에 따라 스프링의 강도에 차이를 둔 7존 매트리스, 매트리스 가장자리 보강 등 21건의 특허가 그의 손에서 만들어졌고, 그 모든 기술이 현재 ㈜금성침대에서 구현되고 있다.


사람을 생각하는 ‘나만의 기술’


중학교 졸업한 까까머리 침대 기능공
경상북도 구미시 장천면이 고향인 고중환 대표는 3남 3녀 중 넷째이다. 중학교를 동년배들보다 한 해 늦게 가야했을 정도로 시골에서도 어려웠던 가정환경이었다. 누구나 다 어려웠던 시절이라 특별히 좌절이나 고민을 하지는 않았다. 여느 시골아이들처럼 집안일을 도우며 구김없이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다.
“어렸을 때 손으로 만드는 것에는 남다른 장점이 있었습니다. 꼼꼼히 잘 만들기도 했지만 남들과 다르게 만들었어요. 썰매를 하나 만들 때에도 친구들과 같은 모양이 아니라 좀 더 잘 미끄러지는 방법을 고민하면서 만들었던 거지요”
중학교를 다니면서 고 대표는 어려운 집안환경을 위해 고등학교 진학보다는 어떻게든 기술을 배워 살길을 찾겠다는 결심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자 서울로 향했지만 열일곱의 까까머리를 쉽게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다행히 형님의 소개로 에덴침대(현 폐업)에 취업을 하게 되면서 고 대표는 침대와의 인연을 시작하게 됐다. 그 때가 1971년이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침대는 고가의 사치품으로 분류됐다. 당연히 침대산업 조차 제대로 틀을 잡기도 전이었고, 매트리스의 스프링 하나하나를 사람의 손으로 만들던 시절이었다. 현장은 어린나이의 고 대표에게 어렵고 힘에 부치는 일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것 자체가 즐거웠습니다. 현장에서 배우는 새로운 기술도 제게는 기쁨이 되더군요.”

효율성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한 기술개발
1975년 입대를 하면서 고 대표는 에덴침대를 퇴사했고, 1978년 제대와 동시에 군복을 입은채 알파침대를 찾아갔다고 한다. 침대관련 기술 경험자가 거의 없었던 시절이라 취업은 쉬웠다. 다시 침대와의 인연을 시작한 고 대표는 공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일에 열중했고, 어느새 매트리스 스프링은 물론 매트리스 제작에 필요한 전 공정에 대한 기술을 모두 익혔다.
“태생적으로 궁금한 것을 못 참아요. 궁금한 것은 꼭 알아내야 했고, 한번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은 밤을 새서라도 끝내야 직성이 풀립니다. 이런 성격 때문에 일을 하면서도 그 과정이 조금이라도 비효율적이다 싶으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을 했습니다”
고 대표가 처음 기능공으로 침대와 인연을 시작하고도 7년의 시간이 지난 1978년에도 우리나라 침대 산업은 여전히 열악했다. 사람이 직접 강선을 구부려 스프링을 만들었고, 그 스프링과 스프링을 연결하는 클립도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고정했다. 숙련된 기술자가 하루 종일 스프링을 연결해도 매트리스 반제품 10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전부였다.
게다가 스프링 결속용 클립은 만들기가 까다로워 한사람이 하루에 겨우 1천500개정도 생산할 수 있었는데, 퀸사이즈 침대 매트리스 하나에 800개의 클립이 사용됐으니, 당시 침대 매트리스의 생산성은 지극히 낮았다. 뿐만 아니었다. 클립의 생산과정도 문제였다.
철판 원장을 그대로 프레스에 넣어 가공을 했는데, 클립의 모양대로 프레스로 가공을 하면 철판에서 버려지는 부분이 40~50%나 됐다. 생산율이 낮았을 뿐만 아니라, 자재낭비도 심했다.
고 대표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먼저, 클립의 생산 방법에 주목했다. 철판에 프레스로 가공을 할 때 생산되는 클립의 배치를 다르게 한다면 버리는 부분 없이 제작이 가능했고 생산성도 높아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한 생산방식을 적용할 금형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개선하고자 마음을 먹었으니 해결을 하고 싶었던 고 대표는 군대 동기가 근무하는 금형가게를 오가며 금형을 만드는 방법을 연구했고 결국 롤 형태의 철판으로 클립을 생산하는 자동화 기계를 만들어냈다. 결과는 말 그대로 ‘대박’이었다.
한사람이 하루에 1천500개를 생산하는 것이 최대였던 당시에 고 대표가 개발한 자동화 기계는 분당 200개가 생산돼 1일 최대 18만개에서 20만개의 생산이 가능했으니 침대업계로서는 획기적인 개발이었다. 자동화 기계의 개발은 그동안 클립의 수급이 어려워 침대 생산량 자체가 적었던 시절, 침대의 대량생산을 암시하는 계기가 됐다. 고 대표는 단층 슬라브 건물 옥상에 천막을 치고 점심시간과 일과 후 시간에 클립을 생산해 알파 침대에 납품을 시작했다. 부업처럼 시작한 창업이었다.

우연처럼 시작된 창업, 그리고 대박
때마침 클립 조립용 ‘air gun’이 수입되면서 침대생산이 조금씩 증가했고, 고 대표가 생산한 클립이 값비싼 수입 클립을 대체하는 용도로 인정을 받으면서, 클립의 수요도 급속히 늘어났다.
알파침대를 비롯해 보루네오, 썬퍼니처 등 클립의 공급을 원하는 곳은 계속 늘었고, 물량도 늘었다. 일과 후에 생산하는 것으로는 주문 물량을 맞출 수가 없게 되자 고 대표는 알파침대를 퇴사하고 본격적으로 클립생산을 시작했다.
“전화기 한 대가 전세 값과 맞먹을 때였어요. 자재를 살 돈도 빠듯했으니 전화기는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주문은 받아야 했고, 전화기를 살 여유는 없어 전화기가 있는 금성냉장고 수리점 옆에 자리를 빌려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주문은 금성냉장고 수리점 전화로 받았어요”
회사이름도 채 짓지 못하고 시작한 사업이었다. 금성냉장고 수리점에서 주문전화를 받다보니 “네, 금성입니다”가 당연했고, 자연스럽게 상호가 ‘금성 공업’이 돼버렸다. 이것이 1982년 금성공업의 시작이다.
금성공업이 만드는 클립은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알려졌다. 보루네오, 썬퍼니처, 에이스침대, 우아미가구 등 대형 가구회사의 주문이 줄을 이었다. 근로자 한 달 급여가 13만원이었던 당시 하루 20만원의 수익이 있었으니 클립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침대업체가 찾아왔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제품을 받아갔을 정도였다. 지금도 고 대표가 발명한 클립 제조방식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으니 당시 개발된 클립의 의미를 짐작할만하다.

또 다른 효율성에 대한 고민
하지만 클립의 인기가 알려지면서 경쟁회사도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독점’에서 ‘다경쟁 구도’로 시장은 확대됐고, 더 이상 클립의 생산만으로 경쟁할 수 없다고 생각한 고 대표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매트리스 커버였다. 당시 매트리스 커버의 누비는 크기가 커서 대형 미싱으로 제작됐는데, 미싱사 1명이 하루 10개정도 생산하는 정도였다. 스프링결속용 클립의 적용으로 매트리스 반제품의 생산이 급격하게 늘어나던 추세였으니, 매트리스 커버의 수요 역시 늘어날 것이라 판단한 고 대표는 매트리스 커버 누비의 생산효율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섰다.
“친구와 함께 점퍼 생산 공장에서 퀼팅기로 점퍼안감을 누비는 것을 보게 됐어요. 그 퀼팅기를 매트리스 누비작업에 적용하면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한번 시도해 봤지요”
고 대표의 예상은 적중했다. 퀼팅기를 이용한 누비생산은 기존의 방식에 비해 100배 이상의 효율을 보였고, 다양한 자수도 가능해 효율성과 다양성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었다. 퀄팅기 2대로 시작한 누비생산은 넘쳐나는 물량을 감당하지 못해 의정부 가능동의 건물 지하로 확장 이전했다. 매트리스용 부품전문회사였던 금성공업사는 금성누비와 금성침대랜드로 나뉘어 매트리스용 누비와 스프링을 함께 생산, 공급하게 됐다.
우리나라 경제의 성장과 함께 사치품으로 분류되던 침대가 생활가구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1986년 아시아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거치면서 수요도 급격하게 늘었다. 회사는 계속 성
장해 지금의 양주시 본사 자리로 다시 이전하면서 퀼팅기 6대를 추가 도입했고, 국내 매트리스 누비시장의 대부분을 독점하게 됐다.

발상 전환이 곧 경쟁력
발상의 전환으로 변화를 이끌어 내면서 우리나라 침대 자재 1위의 자리에 오른 고 대표는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다시한번 변화를 시도하게 된다. 외환위기로 인해 크고 작은 거래처의 부도로 납품대금의 회수가 어려워지면서 자재 납품이 아닌 완제품의 생산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이미 클립제조설비, 누비제작용 퀼팅기, 자동스프링 기계 등 침대 완제품 생산에 필요한 모든 설비를 갖추고 있었던 터라, 완제품 공장으로의 전환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완제품 생산 공장으로의 전환은 부분생산전문이던 다른 침대회사들과의 차별화이기도 했다. 매트리스부터 프레임까지를 모두 한자리에서 생산하게 되면서 시장은 더욱 커졌다. 대형 가구회사들의 OEM 수주가 늘어났고, 회사의 외형은 더욱 성장하게 된 것이다.
지속적인 성장이 계속되던 2001년, 고 대표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외환위기 때 조차 성장을 거듭했던 그를 좌절시킨 사건은 바로 화재였다. 누전으로 인한 회재로 공장이 전소 됐고, 확보해 둔 자재를 모두 잃은 것도 문제였지만, 주문받은 물량을 일정대로 납품해야 하는 것도 문제였다.
갈 곳 잃은 고 대표에게 도움의 손길은 그간 경쟁을 해온 동종업계에서 찾아왔다. 기계를 가동하지 않는 야간 시간에 공장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줬다. 직원들은 타사공장으로 파견돼 야간작업을 진행했고, 여관이나 컨테이너로 만든 임시숙소에서 생활했다.
“주변의 도움 덕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지만 직원들에게는 힘든 시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도 불평하는 직원이 없었고, 그때 퇴사한 직원도 없었습니다”
인복이 참 많은 것 같다는 고 대표는 당시 공장을 빌려준 업체에는 자신의 기술을 전수해 주었고, 기계정비 서비스로 보답했다. 또 어려운 시기를 함께 해준 직원들을 위해 항상 휴머니즘 경영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소비자중심의 생각에서 이어지는 기술개발
위기에서 더 큰 가능성을 찾은 고 대표는 다시 기술개발에 매진했다. 2001년, 금성침대랜드를 ㈜금성침대로 법인전환 했고, 2002년에는 미국과 캐나다의 유명 침대회사인 ‘Spring wall’사와 기술제휴를 함으로써 한국인에 맞는 ‘플렉서레이터’를 내장한 매트리스를 출시해 허리가 편안한 잠자리를 만들어 냈다.
고 대표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매트리스는 세탁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과감히 깨고 4면 지퍼방식의 매트리스커버를 개발하면서 분리세탁이 가능한 매트리스를 출시했다. 4면 지퍼 매트리스는 이후 재생매트리스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을 때 속이 보이는 매트리스로 금성침대의 신뢰도를 높여주었다. 2004년 출시된 이 제품은 지금까지도 소비자 선호상품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지난 2008년에는 ‘제7회 100대 우수특허대상에’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소비자 중심의 기술개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침대 끝에 걸터앉는 경우가 많아 가장자리의 스프링의 탄성이 다른 부분에 비해 빨리 떨어지는 것에 착안해 가장자리 스프링 보강기술을 자체 개발했으며, 이를 조달용 제품에 접목해 우리나라 침대업체 중 유일하게 매트리스분야 조달 우수제품에 등록했다. 침대 프레임에 LED를 접목한 슬립라이트베드(Sleep Light Bed)로 취침하기 좋은 밝기를 만들어 쾌적한 수면환경을 제공하는 것도 고 대표의 아이디어다.

기술자는 기술로 인정받아야
이렇게 소비자 중심의 매트리스 기술개발은 매트리스에 대한 고 대표의 열정의 산물이다.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면 제일먼저 직접 사용함으로써 그 성능을 모두 직접 확인했다.
1년에 8번 정도 매트리스를 바꾼다는 고 대표는 지금도 깨끗하고 편안한 침대를 만드는 방법을 찾고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도장을 하는 침대 프레임의 경우, 열 건조를 적용해 새 가구에서 나오는 유해물질을 최소화 시키는 것도 고객을 위한 그의 배려에서 비롯됐다.
“금성침대라면 예전에는 모르는 분이 더 많았는데, 지금은 소비자들이 먼저 알고 찾아옵니다. 저는 이것이 기술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기술자가 아니라 경영자였다면 아마 소비자에게 인식되기 쉬운 브랜드를 먼저 개발했을 것이고 광고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가진 것이 기술이었으니, 더디더라도 기술로 소비자에게 인정받는 것이 제가 이 일을 하는 목적이자 앞으로의 목표입니다”

기술, 사물을 보는 다양한 시각
2014년 3월 현재 ㈜금성침대는 총 21건의 특허를 가지고 있으며, 24시간 쉬지 않고 가동 중이며, 140명의 직원이 한 달에 1만2천개의 매트리스를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나라 유명가구의 대부분의 침대를 OEM으로 생산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3대 침대전문기업으로 그 위상은 공고히 하고 있다.
고 대표는 이 모든 것이 ‘기술’에 매진한 결과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기술은 학교에서 배우는 이론이나 현장에서 배우는 기능이 아니라 ‘사물을 보는 다양한 시각’에서 비롯된다고 강조했다.
“기술개발은 없는 것을 새로이 창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불편함을 느끼면 이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불편함의 개선이 그 시작이라면 그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는 생각의 폭을 넓게 가지는 유연성이 필요합니다. 다양한 시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면 개선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찾아낼 것이고 이것이 바로 기술개발입니다”
고 대표는 다양한 시각과 유연한 사고는 평소에 만들어지는 것이라면서, 그렇기 때문에 기술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시간이 켜켜이 쌓여서 만들어 내는 결과물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중학교 졸업 기능공에서 시작해 누구보다 많은 기술을 보유한 침대전문가로의 그의 인생이 바로 그러한 기술인생인 것이다.
“더 나은 수면환경을 위해 ㈜금성침대의 기술개발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저는 소비자의 자랑이 되는 침대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자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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