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인근에 자리한 R 기계단지를 비롯한 인근 중고기계 매매단지를 찾은 취재진 눈에는 기계를 사러 온 사람이나 상담하는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약 4시간가량 이곳저곳을 오가며 관찰했지만, 문만 빼꼼히 열어놓고는 실내는 불을 꺼놓은 채 영업하거나 더러는 셔터를 닫은 곳도 시야에 포착됐다.
주차된 차만 없었더라면 매서운 동장군이 찾아온 이날, 을씨년스러움을 더했을 듯하다.
근처 한 업체를 방문했더니 “요즘 거래가 쉽지 않다. 워낙 경기를 타는 업종이다. 기계라는 것이 원래 경기에 제일 민감하다. 경기가 안 좋으면 제일 먼저 안 사고, 경기가 풀리면 제일 마지막에 구매하는 게 기계다. 지난 설 연휴에 이어 돌아오는 연휴까지 끼면 오래 쉬는 곳들도 있다”고 토로했다.
■ 장기간 지속된 경기침체, 추위에 떠는 유휴설비
이 단지 내 대부분 업체 규모는 약 80평(평당 1천만 원 호가), 제법 규모가 큰 T업체의 경우 대당 8~9천만 원을 호가하는 공작기계 재고 금액만 7억 원 이상 쌓아놓고 있다. 임대료와 관리비만으로도 숨이 가쁠 정도다.
최근 한 달간 얼마나 판매됐느냐는 물음에 “글쎄요…”라고 내뱉으며, 사무실 천장을 공허하게 쳐다봤다. 더 이상 질문하는 건 의미가 없어 보여,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판매 유통망 조직에 대해 보완하거나 필요한 게 없느냐는 물음에 또다시 “팔고 싶다. 그런데 답이 없다. 싸고 좋은 게 팔리는데, 싸고 좋은 것은 없다. 수출이요? 엄두도 못 낸다”라고 일축했다.
“솔직히 말해서 돈 있는 사람들이 중고기계 판매를 하는 경우는 없다. 대부분 은행이나 다른 투자금을 받아 연명한다. 단지 내에서도 수백 개 업체가 밀집해 경쟁을 벌이고 있다. 치킨점처럼 한 집 건너 한 집이다”
판매업체들은 한결같이 “요즘은 소비자들이 기계에 대한 사양부터 상세 세부스펙, 가격까지 꼼꼼히 알아본 다음 구매하러 온다. 인터넷만 뒤져도 웬만한 정보는 다 있다”고 입을 모았다.
그래도 한때 잘나가던 시절도 있었다. 1988년 올림픽 개최 당시 수요가 넘쳐났다. 공작기계 메이커도 없었고, 수요보다 공급을 못 따라갈 정도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새 제품을 판매하는 업체와 중고제품 판매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형태로 구분돼 있었지만, 경쟁구도가 심화되면서 신제품을 취급하던 영업점이나 대리점 측면에서도 마진율이 떨어져 중고기계까지 영역을 넓혀갔다.
일종의 ‘보상판매’라는 형식인데, 새 기계를 파는 대리점들은 갈수록 쌓이는 기계 신제품 재고를 털어내기 위해 구매기업의 중고기곗값을 시세보다 높게 쳐서 사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결국 ‘제살깎아먹기’를 하는 셈이다.
■ 유통 판매구조 투명해질까
그동안 유휴설비는 전문화된 가격 감정평가와 적정가격 산정체계가 미흡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유통업자들의 널뛰기 가격으로 인해 정작 수요자들은 믿고 판매할 것이 없어 유통업체들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기계장비 업체들도 제대로 된 판매가격을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입증해줄 것을 요구해 왔고, 이런 고질적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해 정부가 나서 지난해 11월 25일 시화 MTV단지 내에 한국기계거래소(대표이사 탁용운)를 개장했다.
그동안 답보상태에 머물렀던 유휴설비의 유통·판매 구조를 제대로 정착할 요량으로 정부가 132억 원, 기계산업진흥회와 자본재공조합, 기업은행이 150억 원을 출연했다. 그러나 개장 2개월여 지났지만 아직은 뚜렷한 판매고는 없어 보인다.
기계거래소 이명진 부사장은 “기존 중고기계 유통거래 개선을 위해서 기계거래소가 사실 생겨난 것으로 보면 된다. 암암리에 거래되는 게 아닌 사전에 공정한 경매를 받는 형태로 투명성을 높이고, 국내 기계 유통시장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과정이라 보면 된다. 성능점검을 통해 기계의 상태를 사전에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은 강점”이라며 “아직은 걸음마도 못 뗀 단계지만 지속적인 노력과 ‘가격정보’ 오픈 등 유통상의 자정 노력을 기울이다 보면 DB가 축적되면서 유휴설비 거래가 점차 활기를 띨 것”이라고 피력했다.
경매 참가율이 저조한 이유에 대해 기계거래소 측은 “좋은 물건도 있어야 하지만 경매에 나서려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는다. 시스템적으로 사무실 PC나 앱을 통해서도 참가할 수 있음에도 전반적으로 경기침체와 맞물리면서 수요가 많지 않은 것도 한몫한다. 많이 들어와서 서로 경쟁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면 활성화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유휴설비 거래 시장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관망’이다.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경매에 나서고 판매가 제대로 이뤄지는 것이 확인된다면 점차 그 수는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모두가 지켜보는 입장이라는 게 이쪽 업계의 시각이다. 사실 캐피탈에서 내놓은 제품들이 유통업자들이 선호하는 기계는 아니다. 다소 악성 재고 같은 느낌이 있지만, 수요자만 잘 만나면 판매도 수월하고 기계거래소 내 운용의 묘도 한껏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요자와 공급자들이 좋은 기계를 신속하게 사고팔 수 있는 선순환 구조가 정착하기까지는 다소 시일이 걸리겠지만, 중고기계의 품질 신뢰도를 높이고 이를 담보로 한 금융권 대출이 활성화된다면 또 다른 오프라인 형태의 ‘기계장터’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새 기계를 만들어 판매하는 것만으로는 기계 산업 부가가치를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 정부도 기계 산업 서비스 육성으로 오는 2020년까지 우리나라 기계 산업을 세계 5강으로 도약시키겠다고 천명하고 있는 마당에 유휴설비 매매를 활성화하고 수출로 연결하는 작업을 부지런히 해 나간다면 한국도 기계 산업 강국으로의 위상을 한 단계 격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안영건 기자 ayk2876@kid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