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정부의 경제정책이 구체화되는 가운데 연내 통과 목표로 추진 중인 인프라 투자 법안에 트럼프가 공약한 ‘바이아메리칸 조항’이 포함될지가 새로운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미국 연방정부 기관의 조달구매 시 자국산 제품을 우선 구매하도록 하는 조항이다.‘바이아메리칸 정책’이 관철된다면 우리기업의 미국 공공조달 시장 참여 시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 정부는 1조 달러 규모의 공공인프라 투자를 공약한 바 있어 우리 건설, 기자재, 운송기계, 보안, IT 기업 등의 비즈니스 기회가 확대됐으나, 미국이 WTO의 GPA, 한미 FTA 등을 무시하고 바이아메리칸 조항 도입을 강행할 경우 우리 기업의 참여가 무산될 공산도 있다.
KOTRA의 ‘美 바이아메리칸 정책 분석과 향후 우리기업의 대응 방향’ 보고서를 보면 현재 바이아메리칸 법은 WTO 정부조달협정, 한미 FTA로 對韓 미적용 상태다. ‘바이아메리칸 정책’의 기본이 되는 바이아메리칸 법(Buy American Act)은 1933년 경제 대공황 시 미국의 불황 타개를 위해 만들어졌으며, 모든 연방정부 기관에서 재화 조달 시 미국산 제품을 우선적으로 구매하도록 하는 규정이다.
미국은 한국을 포함해 47개국이 참여한 WTO 정부조달협정(GPA) 가입국이며, 가입국들은 조달 시장에서 상호 최혜국 대우 원칙에 합의해 일정 양허금액 이상의 정부 조달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또한 한국은 FTA의 정부조달 조항을 통해 상호 조달 시장 개방을 합의해 자유롭게 미국 조달시장에 참여가 가능하다. 따라서 바이아메리칸법은 한국에 대해서는 사실상 적용되고 있지 않다. 따라서 GPA에 가입되지 않은 중국, 인도, 베트남 등에 비해 우리나라는 미국 조달(인프라)시장진출에서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원칙적으로 GPA나 한미 FTA 정부조달 조항은 연방정부 조달에만 해당되나, 37개 주정부는 GPA를 준용해 공공조달 시장을 개방, 한국 기업들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다만, 주·지방정부에서도 연방교부금을 받는 프로젝트에서는 미국산 사용의무를 별도로 부과한 ‘바이아메리카법(명칭 주의)’이 적용되거나 자체 자국산 우대 규정을 따로 두고 있음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재건과 재투자 법(ARRA)’을 통해 7천870억 달러를 인프라 투자 등에 투입하면서 바이아메리칸 조항을 포함시켰으나, WTO GPA 가입국과 미국과 FTA를 체결한 국가에 대한 유예 규정을 포함시킨 사례가 있다. 공화당 의원들은 건설원가 상승, 타국 무역보복 등을 우려해서 이번 인프라 투자법안에서도 바이아메리칸 조항 도입을 회의적으로 보고 있어 도입 여부는 미지수다.
트럼프 정책 관철, 회의적 전망 제기
바이아메리칸은 건설 원가 상승, 타국의 무역보복 등을 초래해 득보다 실이 많다는 이유로 결국 전통 공화당 주류의 저항에 직면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엘랜 차오 현 교통부장관도 2009년 당시 바이아메리칸 조항은 ‘미국 주변에 해자를 파는 행위’ 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러시아 철강기업의 자회사인 NLMK 등은 유력 로빙기관을 고용해 바이아메리칸 저지를 위한 對의회 로비를 전개하고 나섰다. 인프라 투자 입법 과정에서 바이아메리칸 논란이 재현될 전망 속에 결국 ARRA 수준 이상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카토연구소의 다니엘 이켄슨 박사는 바이아메리칸 규정은 현재 수준에서 ‘명목상 개선(cosmetic change)’ 이상은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 4월 미국통상대표부가 발표한 국별무역장벽보고서는 이를 역설적으로 바이아메리칸의 폐해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해당 보고서는 “근래 증가하고 있는 세계 각국 정부의 자국산 구매 우대 정책(localization barrier)이 국제 교역 시장을 교란하고 있으며, 미국은 단호하게 차별적인 자국산 우대 정책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트럼프 정부가 주장하는 “Buy American”이 관철될 경우, 교역 대상국들은 “Buy China”, “Buy Canada” 등으로 대응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추세는 오히려 해외 정부조달시장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는 미국 기업들의 활동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우려도 나오고 있다.
상무부 관계자는 “향후 무역협정 재협상 시에 교역 대상국들의 조달시장을 추가 개방하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프로젝트 참여와 협업
바이아메리칸 조항은 연방 공공조달에 해당하는 조항임으로 WTO의 GPA를 받아들인 37개 주정부에서는 적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구체적인 조항은 주·지방정부별로 상이해 진출 지역의 규정, 법규 등을 숙지하는 것은 필수다. 미국 공공조달 경험이 적은 우리기업은 현지 사업수행능력을 입증하는 것이 우선 과제다. 주·지방정부 사업 수주 경험이 많은 현지 중소 건설사, 소수계기업과의 합작투자 또는 M&A 전략을 적극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미국시장 참여에 후발주자인 국내기업은 현지 사업수행능력을 입증하는 것이 선결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유럽기업들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환경 및 컨설팅 분야를, 일본은 첨단 초고속열차 기술, 중국은 가격 경쟁력과 자본력 분야에서 우위를 앞세워 미국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반면 한국 기업들은 후발주자인데다 기술경쟁력, 자본력, 현지 사업수행 경험 등에서 열위에 있다. 설계, 시공, 기자재공급, 운영 및 유지관리 역량과 함께 금융역량까지를 포함한 복합 경쟁력 확보가 시급하다.
민간-공공 파트너십 사업을 노려볼만 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공공인프라 사업 재원 마련 대책으로 민간-공공 파트너십을 독려하고 있다. 연방정부 자금 투입이 배제된 민자 인프라 사업의 경우 미국산 구매의무에서 면제된다.
일본과 중국 기업들은 미국의 민간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에 금융 투자와 동시에 자국 기업(건설사, 제조사)을 패키지로 진출시키는 전략을 활용하고 있다. 일본 아베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첫 정상회담(2월)에서 일본 연기금(GPIF)을 동원한 대규모 인프라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미국 내 민간 고속철도 프로젝트 수주를 위해 일본과 중국 기업들은 금융 투자를 전제 조건으로 치열하게 각축 중이다.
중국은 국영기업인 CSR와 CNR Corp은 컨소시엄을 구성해 10억 달러 상당의 고속열차 차량 수주 경쟁에 참여했다. 중국 수출입은행을 통해 320억 달러의 공격적 차관 지원을 약속하고, 현 브라운 주지사의 정치적 고향인 오클랜드시에 고속열차 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하며 유력한 후보로 부각하고 있다.
이런 점을 보더라도 미국 공공입찰 경험이 부족한 한국 기업은 금융기관·건설사·제조·서비스 기업이 참여하는 선단형 컨소시움 형태의 진출을 적극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윤원석 KOTRA 정보통상지원본부장은 “트럼프 대통령 의지대로 바이아메리칸 정책이 강화된다면 우리 기업의 미국 공공조달 시장 진출은 더 어려워질 것”이라면서도, “이를 극복하려면 주·지방정부 프로젝트 참여, 수주 노하우가 있는 현지기업과의 협력, 민간-공공 인프라 사업 추진 등 대응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하며, KOTRA도 주정부와의 협력확대 등 미 조달시장 진출을 적극 지원할 예정”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