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일보]
각종 범죄가 판치는 지금은 바야흐로 CCTV(Closed Circuit Television: 폐쇄회로 텔레비전)전성시대. 전 세계 CCTV 설치대수가 3천만대를 넘어섰고 우리나라도 360만대에 이르렀다. 꾸준히 CCTV의 인기가 높아지는 이유는 다양한 사건사고 가운데 묵묵하게 진실을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말해주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CCTV가 안전한 사회 구현을 위한 필수 수단 중 하나로 자리 잡은 건 1980년 이후이다. 그 당시 CCTV 시장은 일본이나 미국의 제품이 주축을 이루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국내 CCTV 관련 기술이 좋아지면서 보다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품종을 고객 맞춤형으로 개발하고 제조하며 공급한다. 이러한 국내기업의 혁혁한 공에 빠뜨릴 수 없는 곳이 바로 (주)시스매니아(대표이사 지창환)다.
(주)시스매니아는 국내 CCTV분야에서 20여 년간 CCTV SI(System Integration; 시스템 통합)를 리드해 온 곳으로 끊임없는 연구와 새로운 시도로 약 70여건에 이르는 특허를 출원했으며, CCTV를 넘어서 방범, 방재 분야 기술 선도업체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소년 지창환, 호기심 속에서 공학을 만나다
대구 칠성동에서 태어난 지 대표는 아버지를 따라 경남 밀양 삼랑진읍에서 자랐다. 어릴 적부터 눈에 띄는 모든 것들과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것에 항상 궁금증을 품었다. 집안에서는 시계를 가지고 놀다 부품을 하나하나 파헤쳐 놓기 일쑤였고, 밖을 뛰어놀 때는 낙동강 사이에 놓인 철교다리에 의문을 품기도 했다. ‘어떻게 저렇게 무거운 기차가 많은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데도 강물에 빠지지 않을까’라는 걱정 아닌 걱정을 사서하며 머리를 싸매기도 했다.
그의 호기심은 남다른 길을 선택하는 용기의 바탕이 됐다. 고교 진학을 결정할 무렵, 그는 큰 망설임 없이 경상북도 구미시에 있는 금오공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어릴 적부터 기계에 대한 관심이 큰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향후 전자와 관련한 업종이 발달할 거라는 선생님의 권유에 의해 기계과가 아닌 전자과를 전공으로 선택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구미로 떠났지만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있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어린 마음에 인문계로 진학한 친구들과 멀어지는
것이 슬프기도 했고 그 때문에 1학년 때는 향수병을 겪기도 했다. 그렇지만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왜냐하면 공업계 고등학교로의 진학은 어릴 적부터 가져온 각종 과학계의 궁금증을 해소시켜주는 오아시스를 만난 것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철교다리를 만드는 방법이 트러스트 공법이라는 공학기법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이때였다.
궁금증에 대한 답이 하나, 둘 풀리고 명확해 질 무렵 만난 기능경기대회는 끝없던 호기심이 꿈으로 한 단계 올라서는 계기였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학생의 신분으로 공업전자기기 선수로 참가한 지 대표는 대회 준비를 통해 전자공학에 관한 경험과 이론, 그리고 지식으로 자신을 보다 단단하게 무장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비록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하지는 못했지만 그때의 도전은 지금도 그가 잊지 못하는 경험이다.
생애 첫 직장, 메커트로닉스 꿈을 키우다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 금오공고를 졸업하며 지 대표는 학교 방침에 따라 기술하사관으로 5년간 의무 복무를 하게 됐다. 1986년 봄에 배치 받은 육군본부 통신지원대가 그의 생애 첫 직장이었다.
어릴 적부터 관심이 있던 기계분야 또한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됐다. 전신타
자기나 텔렉스 등 정밀 기계장치 정비를 주로 하며 공학원리를 깨쳤다. 여기에 고교시절 전공으로 했던 전자분야까지 결합돼 기계와 전자에 대한 자신감이 더욱 강해졌다. 이 뿐만 아니라 사진 관련 장비의 정비도 맡게 되면서 많은 실무지식을 배울 수 있었다. 전기·전자공학과 기계공학과의 융합기술인 메커트로닉스 부문에 제대로 눈을 뜬 시점이 이 때였다.
불안했던 청춘이 선택한 건 돈이 아닌 꿈
육군본부에서 그가 꿈을 조금씩 그려갈 무렵,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미래를 보며 그의 불안함과 의구심 또한 커져갔다. 휴가를 나가서 만난 인문계 친구들의 모습은 지 대표의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말끔한 양복을 차려입은 사회인 친구들과 군복을 입고 기계를 만지는 자신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조됐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지 대표는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지금의 자리에서 노력하는 것 외에는 이 심란함을 덜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지 대표는 자신이 가진 ‘기술’을 믿기로 했다. 그 시작은 군 업무를 통해 기술을 더 배우는 것과 스스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 바로 기술자격증 취득이었다. 그는 현역으로 근무하던 당시에도 틈틈 이 전자와 관련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제대할 때까지 전자·통신분야의 총 9개 기술자격을 취득했다.
1991년, 스물 다섯에 전역한 그는 바로 사회로 나갔다. 일자리를 구하던 지 대표에게 바로 두 건의 취업 의뢰가 있었다. 하나는 외국 계측기를 수리하는 업체이고, 또 하나는 CCTV라는 생소한 분야의 업체였다. 월급 차이도 컸다. 외국 계측기 수리업체는 70만원을, CCTV 업체는 45만원을 월급 조건으로 걸었다. 지 대표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곳은 제대할 당시 군에서 받던 봉급보다도 적게 준다는 CCTV 업체였다. 돈보다 가능성과 자신의 분야를 확실하게 꿰뚫어 보고 결정한 것이다.
기계, 전자, 사진의 3박자가 고루 갖춘 CCTV 분야를 선택한 것이 지금의 지 대표를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밝은 미래를 내다보고 입사한 회사가 7개월 만에 문을 닫았다. 혈기 왕성했던 청년은 바로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기술을 살리고 새로운 분야에 대한 관심을 이어 나가기 위해 당시 직장 상사와 동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는 못했다. 급작스러운 시작이었던 탓인지 3년째 되던 해 그는 회사를 나와야만 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여전히 열정과 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CCTV 시장을 바꿔보겠다는 의지로 1995년 4월, 홀로 (주)시스매니아의 전신인 ‘오리엔탈시스템’을 설립했다.
뛰어난 기지로 외환위기와 외제품의 범람에서 살아남다
1990년대는 CCTV의 효과가 입증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하지만 국내 업체가 많지 않은 데다 일본이나 미국제품이 그나마 존재하던 CCTV 시장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 대표는 외환위기로 전환점을 맞이한다. 우리나라 전체의 위기에 모두가 위태로웠지만 지 대표는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국내 생산품에게 있어서는 기회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맬수록 고가의 외제품보다는 저렴한 국산품이 잘 팔렸다. 국내에서 생산하는
각종 부품에 대한 시장수요가 커지자 지 대표는 이때를 기회삼아 시설 공사업에서 제조업으로 업종을 전환했다. 단순하게 높아진 수요만 노린 것은 아니었다. 높은 가격임에도 내구성이나 안정성, 제작기법 등 여러 부분에서 단점을 드러내는 유명 외국제품을 보완하면서도 저렴한 한국형 CCTV 시스템이 정면 승부를 했다.
고객맞춤으로 국내업체의 경쟁력 강화
지 대표는 가장 먼저 회사 임직원들과 고객 요구사항(Needs) 파악에 주력했다. 소비자 요구에 부합하는 상품을 신속히 개발하는 능력과 최대한 빨리 생산하고 투입할 수 있는 제조능력을 구축했다. 그가 노력을 기울인 부분은 일반적으로 CCTV라고하면 떠오르는 카메라와 모니터뿐 만이 아니었다. 각종 센서와 연동하며 정밀 제어를 필요로 하는 촬상부(영상을 전기로 변환시키는 전자부품)와 유·무선을 망라한 통신수단을 의미하는 전송부와 원하는 영상을 자동 또는 수동으로 모니터에 표출하는 감시부, 그리고 촬상부·전송부·감시부를 제어하는 제어부까지 통틀어 포함하는 시스템을 CCTV 설비목적에 가장 부합하도록 알맞은 형태로 구현한 SI를 국내에서 10여 년간 이끌어왔다.
2005년, 주식회사 시스매니아로 법인 전환을 한 지 대표는 고객요구에 따라 대기업이 할 수 없는 다품종 소량생산에 중점을 뒀다. 그의 회사가 생산하는 CCTV와 관련된 제품의 종류가 500여 종에 달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현재까지도 지 대표는 특정 제품에 국한하는 것보다 고객요구를 최우선시해 맞춤형 상품을 개발하고 제조하며 또 공급하는 것이 가장 큰 경쟁력이라 생각한다.
남들은 좀처럼 손을 댈 수 없는 특수 주문형 경호장비를 제작해 납품하고, 수심 수십~수백 m 압력 하에서도 작동하는 CCTV 카메라 설비, 메커트로닉스 기술에 충실한 레일형 CCTV 등 특별주문에 의한 맞춤형 설비를 제작해 납품하는 것이 지 대표와 직원들의 자랑이다.
한편 지대표의 연구와 열성으로 개발된 핵심 CCTV 전송기술은 2007년 4월에 과학기술부로부터 신기술(NET: New Excellent Technology) 인증과 그해 10월에는 산업자원부로부터 신제품(NEP: New Excellent Product) 인증을 받기도 한다.
이제 그가 구축한 CCTV 시스템은 국내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외제품에 의존했던 1990년대 우리나라의 서러움을 풀기라도 하듯 다른 국내업체와 함께 해외로 진출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멕시코에 위치한 포스코 현장에 그의 CCTV가 들어가기도 했고 사우디아라비아 군부대의 감시 시스템 설계 의뢰가 들어오기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군부대의 특성상 신속한 설치와 철거가 관건인데 지 대표 회사의 기술을 적용한 방법이 너무 쉽고 설치비까지 저렴해 설치공사가 이뤄지기 전 사우디아라비아의 군부대에서 오히려 빠진 것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현재는 그 에피소드가 신뢰의 바탕으로 작용해 지금까지 꾸준하게 사우디아라비아와 호우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후속 사업을 진행 중이다.
기술 복제 두렵다면? 더 공부하고 더 나누라
하지만 그가 걷는 길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가장 큰 복병은 바로 ‘복제’였다. 현재 지 대표는 수년 전부터 다른 기업을 상대로 한 신제품 발표는 물론 국내 유수의 전시회에 참여하지 않는다. 다만, 고정 고객층에게는 꾸준히 필요한 사항을 피드백하며 개발 사실을 알린다.
2009년부터는 홈페이지를 통해 상용화된 제품을 공개해 고객들에게 최대의 정보를 제공하는 것에도 주의를 기울였고 신제품을 기획하는 즉시 특허출원을 하는 등 지적재산권 확보를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반면 더 나은 기술을 위한 지식의 나눔 또한 앞서서 실천했다. 국내에서 기술 공유가 다소 폐쇄적이라는 것이 안타까웠던 그는 2006년 ‘CCTV 활용마스터’라는 CCTV 입문서를 펴냈다.
이 분야를 꿈꾸는 후배들을 위한 배려였다. 지금까지 이뤄온 기술과 발전방향을 후배들이 잘 알아야만 CCTV가 더욱 발전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CCTV가 국내에 도입된 지가 40여 년이 지났지만 국내에는 일본 기술서적 한 권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책이 단 한권도 없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뼛속까지 엔지니어인 그가 펜을 잡은 이유였다.
그의 책은 국내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CCTV 관련 서적으로 2010년도 당시 기술에 맞게 수정을 거쳐 증판(CCTV 시스템 구축)했으며 현재까지도 다양한 기관에서 CCTV 관련 기술교재로 활용하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바라보는 것이 기술자의 몫
이제 그는 더 멀리 나아가고자 한다. 2006년에 들어서는 새로운 기술과 변화의 주류에 동참해 CCTV SI 이외에도 공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방송음향 시스템, 전광판 시스템, 계장 및 자동제어 시스템, 국방, 해양, 항공 유비쿼터스 분야 등 새로운 분야로 발을 넓혔다. 2009년에는 기술혁신형 중소기업(INNO-BIZ)으로 확정됐다. 현재는 경기도 화성시로 본사 이전을 준비 중인데 이 역시 새로운 사업을 위한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이산화탄소 감축과 관련한 활발한 국제적 합의가 도출되는 것을 눈여겨 본 지 대표는 세계적 추세에 맞춰 각 가정에서 발생되는 이산화탄소를 이용한 자가 발전을 통해 공급하는 저에너지 소모형 온실과 주택용 채소배양기 개발을 준비 중이다.
현재의 주력사업과는 전혀 다르지만 미래가 필요로 할 것을 미리 예견해 사전에 기술개발을 해야 하는 것이 기술자들의 몫이라는 것이 지 대표의 생각이다. 먹고 살만하다고 안주하는 순간 더 이상 발전은 없다는 것이 그가 항상 우선시 하는 전제이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탐문하고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스스로 움직이는 데서 살아있는 이유를 느끼는 것이다.
인터뷰말미, 지 대표는 기능인으로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완숙한 기술인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 말했다. 도면을 한 장 놓고 그 도면을 보고 따라 만들 수만 있으면 기능인이고, 처음부터 그 도면을 작성할 수 있었던 사람이 바로 기술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