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일보]
용접의 불꽃에 빠지다
김석준 기장의 고향은 경북 울진이다. 3남1녀 중 차남으로 자란 김 기장의 어린 시절은 그리 부유하지 못했다. 6.25때 한쪽다리에 총상을 입고 몸이 불편하셨던 아버님은 읍내의 농업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형님의 뒷바라지만으로도 힘겨워하셨고, 김 기장에게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직업전선에 뛰어들기를 은근히 바라셨다. 김 기장이 살던 마을은 읍내에서도 한참 떨어진 한적한 시골로, 대부분의 아이들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직업전선에 뛰어들었고, 그 중 일부만 읍내의 농업고등학교로 진학을 했던 환경이었다. 요즘의 울진은 청정지역으로 이름나 많은 피서인파가 찾는 관광지가 됐지만 당시의 시골생활은 무지와 가난을 대표하는 곳이기도 했다.
“중학교 시절 등하굣길에 자전거 수리점이 하나 있었어요. 가스용접을 하는 주인아저씨의 모습을 종종 봤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신기해서 한참씩 걸음을 멈추고 구경을 하기도 했어요. 나무가 아닌 쇠붙이를 쇳물을 이용해서 한 덩어리로 만드는 것이 어찌나 신기하던지요. 어쩌면 이것이 졸업 후 취업이 쉬운 공업고등학교 진학을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나중에 고향에서 철공소라도 차려볼 생각이었거든요”
김 기장은 부모님의 도움 없이 진학하는 길을 찾기 위해 수소문 끝에 국비로 공부가 가능한 국립부산기계공고를 알게됐고, 중학교 성적 상위 5퍼센트 이내인 학생에게만 기회가 주어지는 어려운 입학시험에 합격을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김 기장의 아버님은 그의 고등학교 진학을 부담스러워 했다고 회상했다.
“객지에 나가 빨리 기술을 배워 돈을 벌어 시골의 부모님께도 효도하고 싶었습니다. 기술을 익혀 취업을 하면 시골생활을 하루빨리 청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도회지에서 색다른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이불보따리 하나 달랑 들고 새벽 첫차에 몸을 실었어요. 비포장도로를 7시간을 달려 도착한 낮선 도시가 두렵기도 했지만 이를 악물고 기필코 기술을 배워 성공하겠노라 다짐했습니다”
굳은 결심으로 진학한 고등학교였지만 시작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목수들이 사용하는 인치단위의 자를 본 것이 전부였던 김 기장에게 쇠톱으로 쇠를 자르고 줄로 철판을 가공하면서 미크론 단위의 치수를 요구하는 다듬질 작업은 고문처럼 느껴졌을 정도로 힘들었다고 한다. 실습시간 내내 손바닥에 물집이 생기고 터지기를 반복하며 손바닥에 굳은살이 자리를 잡았고 게다가 듣기에도 생소한 금속 용어를 이해하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면서 몇 번이나 ‘내 길이 아닌 것 같다’며 공업계 고등학교의 진학을 후회하기도 했다. 그렇게 후회가 몰려올 때마다 김 기장은 집을 떠나오던 당시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쉼 없는 도전을 즐기다
당시 국립부산기계공고는 1학년 1학기 기초과정 실습을 마치고 전공을 선택했는데, 김 기장은 취업이 쉬운 용접을 선택했다. 또 기능올림픽에 출전해 메달을 따고 싶다는 생각에 용접부분 특활생을 지원해 훈련을 했다.
“3명의 예비선수 끼리 경쟁을 하면서 하루 12시간 이상의 맹훈련을 했습니다. 훈련이 끝나고 난 뒤 배가고파 잠을 설친 날도 많았고, 기숙사 점호시간과 수업시간에 졸기도 많이 했어요”
김 기장은 기숙사에서 점호가 끝난 취침시간 이후에 독서실에서 쏟아지는 잠을 쫒아가며 공부를 했다고 한다. 졸업 후 반듯한 직장에 취직하겠다는 꿈이 있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잠시도 한눈을 팔수는 없었다. 부산에서 보낸 4년여의 시간 동안 가본 곳이라고는 구덕운동장과 용두산 공원, 그리고 해운대해수욕장이 전부였을 정도로 공부와 실습에만 매진했다.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를 할 수 있었고 기숙사비 일부라도 보탤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던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꿈이 있었기에 행복했던 시절이었기도 했다.
“저의 고등학교 진학을 부담스러워 하셨지만, 아버님은 제게 책 속의 어느 위인보다도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김 기장은 힘들 때 마다 초등학교의 문턱도 넘어보지 못하고 자식들을 위해 막노동판에서 열심히 일하시는 아버님의 모습을 그리며 힘든 고비들을 넘겼다고 한다. 쉼 없이 기술연마에 매진한 결과는 달콤했다. 1976년 당시 15세의 나이로 부산지방기능경기대회에 출전해 전기용접부분 금메달을 수상했고, 전국 최연소 금상입상으로 노동청장상도 수상했다. 3학년 2학기가 돼서도 취업이 아닌 전국대회를 위해 노력했지만 아쉽게 고배를 마셨다. 기능사 2급자격증 2개와, 지방대회금메달, 노동청장상을 안고 교문을 나서면서 김 기장은 비록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리는 세계대회 출전의 꿈은 좌절됐지만 더 열심히 노력해서 보란 듯이 멋진 기능인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기술의 나눔을 즐기다
김 기장의 첫 직장은 부산대학교 공과대학 부속공장이었다. 주간에는 학생들의 실습을 지도하고 야간대학을 다니던 중 교원자격증을 따게 됐고, 강원도 영월공고에 발령을 받았다. 실기교사로 부임한 첫 해부터 약 3년 동안은 또래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기능사 자격취득 100퍼센트를 달성했고, 또 지방기능경기대회에 출전시켜 금상입상의 성적을 거두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긍지와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했던 까닭에 김 기장에게는 군복무의 의무가 남아있었다. 당시는 대부분이 현역복무자였고 기술계열 학생들은 방위산업체에서 병역을 이수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김 기장도 군 복무기간 3년의 공백보다는 월급을 받으며 병역을 이수할 수 있는 방위산업체인 현대제철로 이직을 선택했다.
김 기장은 현대제철에서의 급여는 실과수당이 별도로 주어졌던 실기교사시절보다는 박봉이었지만 월급의 반을 쪼개 막내 동생의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학비를 보탰고, 시골의 부모님께도 냉장고와 TV를 사 드리며 직장생활을 하며 못다 한 효도를 했다.
김 기장이 현대제철에 입사한 초기에는 작업복을 입고 12시간씩 근무하는 근무시간도 힘들었지만, 한 달 내내 근무를 하면서 쉬는 날이 하루도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근무하는 일수도 많고 근무시간도 길었지만 실기교사시절에 비해 적은 월급에 실망도 많이 했다고.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배운 용접과는 너무나도 다른 현장용접을 익히기는 쉽지 않았다. 기계정비를 하기 위해서 용접과 절단은 기본이고 금속재료. 기계제도. 유공압, 전기에 대한 기초지식. 열처리 등 다양한 분야를 알아야만 접근이 가능한 것이 현장이었다. 김 기장은 용접의 단순한 영역을 뛰어넘어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것이 힘겨웠지만 다방면의 기술을 모두 익혀서 꼭 완성시켜보고 싶다는 목표를 세웠다. 현장에 대한 빠른 적응을 위해서 퇴근 후에는 전공서적을 구입해 기초를 다졌고, 이를 바탕으로 현장에서는 기계정비의 전 과정을 몸으로 익혔다.
전문기능인으로 인정받다
현장에서 숙련기능인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그는 또 다른 목표를 세웠다. 현장에서 쉽게 접하지 못하는 특수용접 기술을 익히고, 현장에서 익힌 숙련된 기능을 바탕으로 기술적 이론을 정립하려 했다. 김 기장은 무엇보다 기술에 대한 인정을 받기 위해 기능장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당시 창원기능대학은 기능사 1급 자격증을 취득하고 5년이 경과해야만 입학할 수 있었고 기능대학을 졸업해야만 기능장 시험에 응시자격이 부여됐으므로 기능장이 되려면 꼭 기능대학을 졸업해야 했다.
“당시 기능장을 양성하는 국내 유일의 기관이 창원기능대학이었습니다. 그때 회사에서는 독일과 이태리에서 신설비가 도입돼 제가 외국인과 같이 작업을 하면서 기술을 전수받고 있었습니다. 제 개인적인 공부를 위해 현장을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만한 상황이 아니었는데, 배움에 대한 열정이 너무 강했던 까닭인지, 기회가 열리더군요, 운이 좋게도 국비로 공부를 하면서 급여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겁니다. 기회가 주어졌으니 노력만 하면 됐지요”
창원 기능대학을 다니면서 김 기장은 마음껏 잠을 자본 기억이 없다고 한다. 회사의 지원으로 공부를 하고 있으니 하나라도 더 배워야 했고, 내가 공부할 수 있게 길을 열어준 회사와 동료들에게 보답을 하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공부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30대 중반에 시작한 공부였고, 현장에서 익힌 기능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어 힘은 들었지만 즐겁게 공부를 했다.
여름방학 학우들은 일본 견학을 갔지만 김 기장은 학교에 남았다. 대신 독일에서 마이스터(Meister) 자격을 취득하고 기능대학에 온 교수님에게 알루미늄과 스테인리스 용접에 대한 Know-How를 여름방학동안 전수받았다. 그 덕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면서 기능대학장상과 직업훈련교사 면허를 취득했고, 결국 현대제철 1호 기능장의 꿈(93년)을 이뤘다.
용접, 그 너머의 기술을 향해
공부를 마치고 현대제철로 돌아온 김 기장은 압연설비의 핵심파트이자 가장 고장발생이 잦은 윤활유관리와 자동결속기. 유니버설조인트를 전담하는 파트를 담당하게 됐다. 김 기장은 한사람의 지식이 아니라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것이 기술의 가치라 생각, 본인이 담당하는 파트의 설비들을 누구나 쉽게 구조 및 해체조립이 가능하도록 매뉴얼을 만들었다. 또 고가의 부품을 국산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 고압을 취급하는 디스켈러 설비의 배관과 특수강의 보수용접을 도맡아 하면서 설비의 가동률을 향상시킴으로써 원가절감의 효과를 만들어 냈다. 뿐만 아니다. 주문한 부품들이 입고되면 재질은 물론 정밀측정공구를 이용해 치수가 허용공차 이내로 가공이 됐는지도 꼼꼼히 검사를 함으로써 사전에 불량품을 제거해 현장에서 발생할 문제를 예방했다. 유 분석 장비를 이용해 우리 몸의 피와도 같은 윤활유를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관리해 감속기의 수명을 연장시켰고, 윤활로 인한 고장을 사전에 방지한 것도 김 기장의 노력이었다. 요즘은 감속기가 보내오는 진동으로 기계의 이상 유무를 진단하는데, 감속기는 압연기를 구동하는 핵심설비로 한번 고장이 발생하면 복구하는데 만 15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주요설비라서 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 김 기장의 설명이다.
용접이 적용되는 분야라면 생소한 관련기술이라도 거부감 없이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배웠고, 현장에 적용했다. 사내에서 산소공장을 신설할 때의 일이다. 컴프레서와 연결되는 진동이 심한 배관부위에 용접결함이 발생해 시운전이 지연되고 있었다.
김 기장이 현장에서 직접용접을 했고, 감독관의 초음파 검사를 가뿐히 통과해 정상 가동시기를 앞당겼다. 용접을 전공하고서도 용접과 연관은 있지만 조금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생각했던 김 기장은 이 사건으로 용접에 대한 자신의 기술에 자부심을 느꼈고, 용접전공의 보람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현장에서 주어지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 생산성 향상과 기술개발에 대한 김 기장의 노력은 2001년 품질명장 선정, 2011년 산업포장 수상, 보훈처장상 수상, 포항시장상 수상을 비롯 모범사원, 우수사원 표창 등으로 충분히 짐작할 만 하다.
채우고 또 나누어 더 키우는 기술
현대제철 기능장 1호로 다양한 분임조 활동과 지속적인 개선활동으로 현대제철의 생산성향상을 위해 노력해온 34년의 시간에 대해 김 기장은 ‘언제나 배움의 연속’이었다고 말한다.
현장에서 생기는 궁금한 점에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이었다는 설명이다. 어떤 결과를 도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배움을 더 많이 나누기 위해 노력한다. 구성원들의 직무능력향상을 위한 사내교육은 물론 신입사원 및 진급자 특강, 개인휴가를 써 가며 청송직업훈련교도소와 포항폴리텍대학. 직업전문학교의 기술숙련과정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기능경기대회 심사위원과 기능장을 비롯한 기능검정의 감독활동도 해오고 있다. 개선활동과 원가절감에 크게 기여할 뿐 아니라 다양한 봉사활동을 한 덕분에 그는 미국을 비롯해 독일. 이태리. 스위스. 일본등지에 연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그 덕
분에 전문분야의 깊이와 폭을 더 넓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하고자 하는 자는 방법을 찾고, 게으른 자는 구실을 찾는다 했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렵다거나 시작하기에 너무 늦었다는 것은 핑계입니다. 단기간에 큰 성과를 내겠다는 조급함은 욕심이지요. 핑계와 욕심을 버리고 전문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지금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학벌이 아닌 전문 기술을 가진 사람만이 오래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김 기장은 치밀하고도 실천 가능한 계획들을 세우고 꾸준한 실천으로 작은 꿈부터 이루어 나가면 어느새 전문 기술인의 자리에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본인 역시 반복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설비와 비효율적인 설비의 개선에 더 심혈을 기울여 개선해 나갈 것을 약속했다. 또 그동안 현장에서 쌓은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모두 전수해 후배들이 전문 기능인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이다. 해 본일이 많은 사람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기술인이 되기 위해 그는 배움을 위한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무엇이 돼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한 눈 팔지 않고 열심히 외길을 걸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받은 과분한 보상을 이제는 내가아닌 우리를 위해 살아가는데 쓰고 싶습니다”
혼자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다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현장의 고민을 머리 맞대고 고민하면 해결이 가능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또 지금까지 쌓아온 재능을 사회를 위해 기부하고 싶으며 그늘진 이웃과도 함께하면서 웃음을 나누고 싶단다. 국가의 예산으로 공부를 했고, 회사의 특혜를 받으며 성장했으니 이제는 그 보답을 하고 싶다는 김석준 기장. 그의 배움과 실천이 회사의 발전과 대한민국 철강 산업의 발전에 주춧돌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