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일보]
국내 연구진이 100여 년간 정유 산업의 주류 공정으로 자리 잡아 온 증류 중심의 분리 방식을 대체할 수 있는 고분자 분리막 기술을 개발했다. 기존 공정의 과도한 에너지 소모와 탄소 배출 문제를 완화할 대안이 될지 주목된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는 생명화학공학과 고동연 교수 연구팀이 조지아텍 라이언 라이블리(Ryan Lively) 교수팀과 공동으로 상온에서 원유를 분리할 수 있는 고분자 기반 분리막 기술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현재 전 세계 정유 공장은 원유를 350℃ 이상으로 가열했다가 식히는 증류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소비되는 에너지는 연간 1,100TWh(테라와트시)에 달해 온실가스 배출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연구팀은 별도의 기능적 선택층을 코팅하지 않은 다공성 고분자(PAN) 분리막에 원유를 직접 통과시키는 방식을 적용했다. 원유 속 무거운 중질 성분이 분리막 내부 기공 벽에 선택적으로 흡착되며 기공 크기가 2나노미터 이하로 수축해 분리 통로가 형성되는 원리다. 이를 통해 나프타, 휘발유, 등유 등 가벼운 성분은 통과하고 무거운 성분은 차단된다.
연구진은 개발된 분리막이 기존에 보고된 원유 분리막 대비 23배가량 빠른 분리 속도를 기록했으며, 28일간의 연속 운전에서도 안정적으로 작동했다고 밝혔다. 기존 정유 공장의 배관 시스템에 필터 모듈 형태로 장착할 수 있어 대규모 설비 교체 없이 도입할 수 있다.
공정 시뮬레이션 결과, 원유를 분리막으로 우선 처리하고 잔여 성분만 증류할 경우 기존 방식 대비 에너지 소비는 31.6%,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37.6%, 운영비는 36% 감소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해당 기술이 국내 정유·석유화학 산업 전반에 적용될 경우 승용차 400만 대 배출량에 해당하는 연간 약 1천만 톤 규모의 온실가스 감축 효과가 예상된다.
고동연 교수는 “이번 연구는 분리막이 복합 혼합물과 상호작용하며 스스로 분리 통로를 형성한다는 과학적 원리를 규명한 성과”라며 “HD현대오일뱅크와의 협력을 통해 실제 원유를 활용한 검증까지 수행해 산업 적용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공동 교신저자인 KAIST 이재우 교수와 제1저자인 최지훈·서혁준 박사는 “자발적 기공 수축 현상을 제어해 향후 정유 공정 전반에 활용 가능한 분리막 플랫폼 기술로 발전시키겠다”며 “폐플라스틱 열분해유 정제와 배터리 용매 회수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해 탄소중립 실현에 기여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