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일보]
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자동차 경주로 불리는 ‘르망 24시(24 Hours of Le Mans)’. 24시간 동안 최대 시속 300km가 넘는 속도로 5천 km 이상을 쉬지 않고 달리는 이 레이스는 단순한 스포츠 이벤트가 아니다. 자동차 제조사들의 기술과 내구성 등 제조 역량 전반을 검증하는 혹독한 시험장이다.
지난달, ‘2026 르망 24시’에 현대자동차그룹이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Genesis Magma Racing)’ 팀으로 한국 브랜드 최초 최상위 클래스(LMDh)에 도전했다. 모터스포츠 기반의 브랜드 마케팅으로만 볼 수도 있지만, 이 도전은 미래 제조업 혁신의 출발점이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AI 시대’를 준비하면서도 ‘차’를 잊지 않았다
현대차는 최근 몇 년간 AI와 로보틱스 분야에서 가장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는 기업 가운데 하나다.
2020년 보스턴다이내믹스(Boston Dynamics)를 인수했고, ‘CES 2026(Atlas)’에서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를 내세우면서 피지컬 AI를 미래 성장축으로 제시하고 있다. 자동차 제조사를 넘어 로보틱스 기업으로의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기술은 상대적으로 주춤하고 있는 모양새지만, 올해 초 테슬라와 엔비디아에서 오토파일럿·자율주행을 담당했던 박민우 그룹 AVP 본부장 겸 포티투닷(42dot) 대표이사를 영입하며 다시 속도를 내고 있다.
이렇게 현대차는 AI를 비롯한 첨단 기술을 강조하면서도, 결국 자동차를 만들고 전통 내구 레이스 무대에 뛰어들어 기꺼이 검증에 나섰다. 미래 기술에 투자하면서도 현대차의 본질인 ‘차를 만드는 기술’ 역시 놓지 않겠다는 전략으로 읽힌다.
F1 대신 르망 택한 제네시스, WRC 유산으로 극한의 24시간을 버텨내다
모터스포츠의 정점으로 흔히 ‘F1’이 지목된다. 그러나 현대차가 선택한 무대는 르망이었다. 여기에는 상업적 실리와 기술적 명분이 깔려있다.
오픈 휠 방식의 F1 레이싱카는 양산 차량과 구조적 괴리가 크다. 반면 르망의 경주용 차량인 ‘하이퍼카’는 엔진과 하이브리드 시스템, 공력 구조를 고성능 양산차 개발에 곧바로 이식할 수 있다. 지정된 공용 섀시를 활용하는 LMDh 규정은 F1 대비 개발 비용 부담도 적다. 특히 페라리·포르쉐·BMW·도요타 같은 전통 강호들과 정면으로 경쟁한다는 것 자체가, 현대차의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의 기술력을 알릴 수 있는 의미 있는 시험대였다.
현대차는 주로 비포장·험로를 질주하는 ‘WRC(월드 랠리 챔피언십)’에 지속적으로 출전하며 내구 레이스 경험을 축적해 왔다. 이렇게 흙길에서 쌓아온 고부하를 견디는 소형 터보 엔진과 사륜구동 기술은 이번 르망에도 쓰였다.
올해 르망에 참가한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의 레이싱카 ‘GMR-001’에 탑재된 엔진은 완전히 새로운 설계가 아니었다. 24시간 레이스를 견디기 위한 엔진의 주요 부품 설계부터 검증, 생산까지는 시간이 부족했던 상황에서, WRC에서 충분히 검증된 4기통 엔진을 기반으로 규정에 맞게 발전시키는 방식을 택했다. 시간 부족이라는 한계를 오랜 기간 축적한 기술적 유산으로 메운 셈이다.
첫 출전 결과는 화려하지 않았다. 17번 차량은 레이스 종료를 약 7시간 30분 앞두고 서스펜션 파손으로 리타이어 했다. 19번 차량은 레이스 내내 문제가 이어지며 트랙 위에 멈춰서는 불안한 모습을 보였지만, 끝내 13위로 도착하며 데뷔전을 완주하는 데 성공했다.
이 기록을 두고 10위권에도 들지 못했다는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나 르망에서 완주는 단순한 기록에 그치지 않는다. 24시간 동안 고속 주행하는 극악의 환경을 버텨냈다는 사실 자체가 신뢰성의 증거이며, 레이스에서 얻은 수많은 데이터는 모터스포츠 경쟁력과 제네시스 기술력 강화의 자산이 된다.
디지털 트윈과 AI 시뮬레이션은 현실을 정교하게 모사할 수 있지만, 실제 극한 환경에서 축적되는 ‘현실 경험’ 데이터는 만들어낼 수는 없다. ‘자동차는 도로 위에서 완성된다’라는 오래된 명제가 AI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현대차의 르망 도전기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끈 것은 웨어러블 로봇 ‘엑스블 숄더(X-ble Shoulder)’였다.
로봇은 작업자의 어깨 근골격계 질환을 예방하는 데 초점을 맞춰 현대차 로보틱스랩(Robotics LAB)이 개발했다. 위를 올려다보며 일하는 ‘윗보기 작업’에 최적화된 설계로, 가해지는 어깨 관절의 압박을 최대 60%까지 줄여준다. 별도의 배터리 충전 없이도 구동이 가능하도록 스프링을 활용한 무동력 방식을 채택해 현장 실용성을 높였다.
다만 엑스블 숄더의 역할은 피트 크루의 작업 부담을 덜어주는 데까지였다. 찰나의 순간이 순위를 결정짓는 피트에서의 초 단위 차량 정비는 노련한 메카닉들의 판단과 협업에서 갈렸다.
AI·자동화를 ‘사람을 줄이는 기술’로만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 요즘, 현대차는 새로운 기술이 기존의 방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된 현장의 숙련도와 경험을 더욱 가치 있게 확장하는 수단임을 제시했다.
기술은 경험 기반의 현장 숙련도를 확장한다
최근 산업계는 AI와 피지컬 AI를 미래 경쟁력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미래 기술은 현실에서 검증된 제조 경험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완성된다.
현대차의 르망 도전은 AI가 단순히 제조업의 현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축적된 경험과 데이터를 더욱 가치 있게 활용하기 위한 기술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오랜 시간 벼려온 아날로그 자산 위에 새로운 기술적 가치를 촘촘히 쌓아 올리는 것, 그것이 AI 시대에 제조업이 미래를 준비하는 방식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