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일보]
인공지능(AI) 시대 개막과 함께 전력 수요가 폭증하는 가운데, 전력망의 물리적 안전성부터 사이버 보안까지 아우르는 ‘전력안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과 더불어민주당 박선원 의원실이 국회에서 최근 개최한 ‘전력안보와 산업 발전을 위한 입법 지원 방안 모색’ 세미나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AI데이터센터(AIDC) 증가로 인한 전력 계통 불안정성, 디지털 변전소와 같은 IT 기술 도입에 따른 사이버 공격 표면 확대 등을 주요 위협 요인으로 꼽으며 법제도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AI데이터센터, 전력망 ‘오버제너레이션’ 위협…보완장치 마련 필요
한국전기연구원 이정호 책임연구원은 AIDC의 급증이 전력 계통에 미치는 위험성을 진단했다. 그는 “해외 전력 공학 컨퍼런스에서도 AIDC가 전력 계통에 일으키는 문제와 파급효과를 최소화하는 것이 화두였다”라고 전했다.
이 책임은 “전력 계통의 안전성은 일부 설비의 고장에도 끊김 없이 전기를 계속 공급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핵심”이라며 “전기는 전압이나 주파수를 일정한 범위 내로 유지시켜야 하기 때문에 이를 벗어나게 되면 전기 설비의 자가 보호 기능이 발동돼 작동을 멈춰버린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AIDC는 1초에도 수백 메가와트(MW)의 부하가 급격히 늘거나 줄어드는 특성을 보이고 있으며, 계통 외란이 발생하면 보호를 위해 전력망 대신 자체 발전기로 전력 공급원을 변경한다”라며 “이는 수 기가와트(GW)의 부하가 망에서 탈락하면서 주파수가 급격히 상승하는 ‘오버 제너레이션(Over Generation)’ 현상으로 이어진다”라고 말했다.
이어 “발전기에 문제사 생기면 주파수가 하락하기 때문에, 한국은 발전기 2개가 고장나는 상황에 대비해 신뢰도 기준을 59.2헤르츠로 설정하고 있다”라며 “그러나 주파수의 급증에 대비한 기준은 없어, AIDC의 갑작스러운 탈락에 대비한 제도적 보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라고 내다봤다.
구체적으로는 대규모 데이터센터가 계통 이상에도 일정 시간 이탈하지 않고 견디는 ‘의무 라이드스루(Ride-Through)’규정과 ESS(에너지저장시스템)를 활용해 급격한 부하 하락 충격을 줄이는 ‘램프율 제한(Ramping Rate Limit)’ 등의 법제화를 제언했다.
‘유연성 자원’으로 건설 한계 극복하고 생태계 육성해야
LS일렉트릭(LS ELECTRIC) 서장철 전력CTO는 국가 전력안보 전략에 담겨야 할 과제로 ▲대규모 핵심수요 기반 통합 설계 ▲공급능력 및 유연성 자원 확보 ▲자립성·회복성 강화 ▲사이버 보안·핵심기기 공급망 편입 ▲산업 생태계 조성 등을 제시했다.
서 전력CTO는 “추가적인 발전원 없이는 막대한 전력 수요를 감당할 수 없으며, 유연성 자원이 대안”이라며 “그러나 유연성 자원은 기존보다 비용이 높은 만큼 ‘전력망 건설 대안(NWA)’과 같이 이를 수용하고 전력 계통에 빠르게 포함할 수 있는 정책적 방안이 필요하다”라고 짚었다.
산업 생태계 관련해서는 “국내 기업들이 충분한 기술과 제품을 이미 확보하고 있는 만큼 정부에서 국산화나 실증, 수출과 연계한 산업 정책을 마련해 뒷받침해 주길 바란다”라고 밝혔다.
전력산업 디지털화, 해킹 공격으로 이어져
코어시큐리티 한근희 부사장은 전력산업의 디지털화에 따른 사이버 공격 위협을 경고했다. IT·소프트웨어 기능이 추가될수록 해커들의 공격 표면이 광범위하게 늘어난다는 것이다.
실제 사례로는 지난해 중국산 태양광 인버터에서 백도어 악성코드가 발견된 사건을 들었다. 이후 미국은 관련된 중국 기업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미국 내 판매를 금지했고, 유럽도 차단에 나섰다.
한 부사장은 “EU(유럽연합)는 전력·에너지 분야 사이버 보안 취약점을 다루는 ‘CRA Duty’를 마련해 문제 발생 시 전 세계 매출액 기준 2.5% 또는 2천만 유로 이상의 벌금을 규정하고 있으며, 미국은 ‘NERC CIP’를 통해 전력·에너지 보안을 규제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이어 “그러나 한국은 전력·에너지 사이버 보안 법령이 부재한 실정”이라며 “IEC 62443과 같은 국제 표준 기반의 인증제도를 정비하고, 자체 대응 여력이 부족한 중견·중소기업을 위한 정부 차원의 마중물 역할이 절실하다”라고 촉구했다.
토론회에서 전문가들은 분야별 대응책 마련과 더불어, 이를 종합적으로 관리할 ‘컨트롤 타워’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파편화된 전력 관련 법령 및 제도를 정비하고, 국가적 차원의 전력안보 전략을 수립·집행하는 범정부 컨트롤 타워가 조속히 신설돼야 한다는 주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