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서 가질 수 없었던 목표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2남 5녀 중 막내로 태어난 정을연 대표는 어머니와 넷째누나를 도와 집안일을 담당했다. 시골 농사일부터 집안의 소소한 일까지 어머니의 일손을 덜어드리기 바빴던 정 대표는 ‘공부를 잘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했다고 한다. 당연히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목적도 목표도 없었으니 학교수업이 즐겁지도 않았다. 힘든 집안 일이 싫어 ‘성공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열망은 있었지만 성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시골마을, 그저 그런 집안 환경 덕에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무난하게 졸업했다.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없었으니 고등학교 진학에 대해서고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 공부는 싫고 ‘전기기술’을 배우면 먹고 사는 것은 문제없을 거라는 생각으로 논산공고 전기과로 진학했지만 중학교 시절보다 더 자유로웠던 고등학교 환경에서 공부보다는 일탈을 일삼았다.
“그때는 공부가 참 싫었습니다. 왜 하는지를 몰랐으니까요. 수업시간에는 공상을 하며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들었고, 실습시간은 기숙사로 도망가서 놀았지요. 학교에서는 그렇게 말썽을 부리는 학생이었지만 집에만 가면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돕는 착한아들이었습니다”
철없던 시절, 잦은 일탈을 일삼았던 정을연 대표가 세상에 대해 눈을 뜬 것은 고등학교 3학년 현장실습을 통해서라고 회고했다.
“구로동 공장에서 실습을 했는데 당시 제가 받는 월급이 2만8,000원이었습니다. 밤 10시까지 잔업을 하면 2,000원을 더 받을 수 있었고, 매일같이 야근을 해야 5만6,000원을 벌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점퍼 하나 가격이 2만원이었어요. 그것이 제가 처한 현실이었습니다”
당시 대졸자에 대한 대우와 현장기능공에 대한 대우도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일하는 부서부터 급여수준, 근무환경이 너무나 다른 현실은 정 대표를 좌절하게 만들었고, 그때서야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왜 대학을 가야하는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차가운 현실에 눈뜨다
“늦었지만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처럼 대학을 가야겠다 싶더군요. 하지만 그때 다시 또 알게 된 것은 공부는 기본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처음으로 공부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지난 시절을 후회했다는 정 대표. 그의 재수 시절은 기본이 없는 상태에서 대학진학을 위한 공부는 불가능하다는 사실만 깨달은 채 끝났다.
“공부를 포기했지만 제 인생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젠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고,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정을연 대표는 미래를 준비하지 못했던 지난 시간에 대한 처절한 후회 덕분에 자신이 처한 현실이 무엇인지, 무엇을 해야 성공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할 수 있었다고 피력했다. 그리고 남들이 하기 힘들어 하고, 또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을 해야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도금업계로의 입문은 우연한 기회였다. 남들이 하지 않는 힘든 일을 찾다가 생각한 것이 남대문 시장에서 오퍼상을 하는 것이었다. 열심히 공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3년간 배운 전기 기술이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대문 시장을 가기 전에 우연히 인천에 살고 있는 누님에게 다니러 간 것이 도금과의 첫 만남이었다.
“10평 남짓 작은 공장에서 매형은 기술을, 누님은 영업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일손이 부족해 쩔쩔매고 계셨어요. 누나가 할 일을 찾아나선 제게 군대 가기 전까지 같이 일하자고 하시더군요. 누님을 도와 드려야겠다 생각도 했고, 도금 분야도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업종이다 싶어 그날부터 누님의 공장에서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1986년, 정을연 대표는 이렇게 누님의 부탁으로 도금업과 인연을 맺게 됐다. 생산직 근로자였던 정 대표는 앞치마를 두르고 장화를 신은 채 도금 작업을 했다. 군납용 금속제품으로 크롬, 니켈, 주석 등의 도금을 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한겨울에도 민소매의 옷을 입고 작업을 했다. 하루종인 금속제품을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땀은 비 오듯 흘렀다. 예비군조교로 근무했던 방위병 시절에도 밤샘작업이 일상이었다. 모든 공정이 수작업으로 이뤄지던 때라 몸이 힘든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현장에서 꿈을 찾다
“젊은 혈기에 도망도 몇 번 갔습니다. 꼭 이렇게 힘든 일을 해야 하나 싶었거든요, 그때마다 누님이 찾아오셨고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이라는 걸 하게 된 거지요”
열여덟에 시작해 쉼 없이 일만했다는 정 대표는 주어진 생산량을 채우는 것에 급급해 하루 하루를 연명하다시피 보내다보니 힘이 들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이 일을 하면서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 때부터 현장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생각을 하고 안하고의 차이가 그렇게 큰 줄 몰랐습니다. 단순히 생산량을 채우는 것에 급급해하며 일을 하는 것과, 이 분야에서 1등을 하고 싶다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꿈이 생긴 거지요”
목표가 생기자 일하는 방법도 달라졌다. 어깨너머로 본 것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도금의 원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도금된 제품이 쓰이는 분야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그제서야 현장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본격적인 도금 전문가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
도금이란 물건의 표면 상태를 개선할 목적으로 다른 물질의 얇은 층으로 피복하는 일로 금속 표면에 다른 금속(순금속 외에 합금도 포함)의 얇은 층을 입히는 것을 말한다. 도금을 하는 원리는 간단하지만 얼마나 균일하게 또 얼마나 정확하게 도금을 하는지부터 얼마나 빠르게 생산하는 것까지가 모두 경쟁력이다.
정 대표는 도금의 완성도는 물론 생산량 증가와 원가 절감에까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2000년은 국내 휴대폰 시장이 급성장을 하던 시기라 도금제품의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도금업에도 자동화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제품 너머까지 생각하는 기술
2000년, 매형으로부터 회사를 물려받은 정 대표는 시장의 수요에 발맞추기 위한 도전을 시작했다. 먼저 명진금속을 (주)명진화학으로 법인 전환했고, 자동화 라인을 설계했다.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자동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무작정 라인을 만들고 부수고를 반복했습니다. 경쟁업체에서는 일본의 생산라인을 모방하거나 중고라인을 사서 설비를 했는데 저는 그런 방법조차 몰랐어요, 오로지 머릿속으로 생각해 기계를 만들어 적용해 보고 아니면 부수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릴투릴(Reel to Reel) 자동도금 및 부분도금과 관련된 특허’다. 뿐만 아니다 휴대폰, 자동차 부품, 산업용 초정밀 커넥터, 반도체 리드프레임 등 도금이 적용되는 분야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로 도금기술을 개발하고, 품질을 향상시켰다. 꼭 필요한 부분에 도금이 적용되도록 기술을 개발해 원가를 절감했고, 도금제품의 내구성을 높이는 방법을 연구함으로써 도금제품 뿐 아니라 그 제품에 적용되는 전자부품 내구성까지 높였다. 이는 단순히 도금을 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가 아닌 도금이 적용되는 모든 제품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성과라고 자평했다.
2010년부터는 자체 기술연구소를 설립해 12명의 연구원을 두고 기술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또 한국폴리텍대 재능대 등과 산학협력도 진행 중이다.
“도금을 하고 생산량을 맞추는 일에 급급했다면 발전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전자제품의 발전 덕분에 시장이 열렸던 것도 도움이 됐습니다만 제가 만든 도금 제품이 적용되는 부분까지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기술개발의 필요성도 느꼈고, 그 과정이 미련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모방이 아닌 자체 연구개발로 이루어 냈기 때문에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했습니다”
위기는 성공의 디딤돌
대표가 직접 경영을 시작한 2000년부터 회사는 급격하게 성장했다. Reel to Reel 설비의 도입은 하루 3만개의 생산량은 30만개로 증가시켰고, SPOT, STRIPE, INKMASKING DVICE, SN REFLOW등 다양한 도금기법을 개발함으로서 도금업계 1위 기업으로 우뚝 섰다. 주문은 넘쳤고, 도금을 요청하는 기업도 줄을 섰다. 월 매출 5천만 원의 기업이 월매출 47억 원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말 그대로 승승장구였다.
호사다마. 늘 그렇듯 가장 좋다 생각할 때 위기는 닥친다. 정을연 대표의 위기는 2011년이었다. 2011년 3월에 인천 남동공단 공장이 불이나 2층이 전소했고, 이어 5월에 다시 1층이 불이나면서 공장 자체가 내려앉았다. 첫 번째 불이 난 이후 검단공단으로 공장이전을 추진 중이었던 터라 2차 화재에서는 보험도 적용되지 않았다. 두 번의 화재 손실액만 180억 원이 넘었다. 연매출 450억 원의 회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규모였다.
손실액도 엄청났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계약된 물량의 생산이었다. 당시 갤럭시 S2의 부품재고가 21일치 밖에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라 21일 내에 물량을 납품해야했다. 갤럭시 S2에 적용되던 도금기법은 (주)명진화학의 특허가 적용되던 부분이라 다른 곳에서는 생산이 불가능 했다. 도금제품의 공급부족으로 갤럭시 S2의 생산자체가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불탄 자재들을 폐기하는 데만 한 달이 걸리는 상황은 말 그대로 암담했다.
“눈물밖에 나오질 않았습니다. 내일아침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그 누구도 저를 도와줄 수 없었고 어떤 결정이든 제 스스로 해야 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 분명 다시 시작해야했다. 그 때 정 대표는 ‘죽을힘을 다해 몰입했다’고한다. 한 달 가량의 폐기물을 3일 만에 치웠고 동시에 공장발주와 설비발주를 진행 했다. 시청과 구청을 찾아가 인허가를 마치고 5일째부터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발주한 설비가 차례로 들어오고 18일째 되는 날, 거짓말처럼 샘플 생산을 완료했다. 그리고 20일째 양산을 시작했다.
20일 동안 20시간도 못자고 현장을 지켰던 정 대표는 2011년의 화재복구를 ‘전 직원이 한마음이 돼 함께 이루어낸 신화’라며 이 때 함께해 준 직원들에 대한 소중함을 마음깊이 새겼다.
“누가 봐도 ‘포기’를 생각 할 수밖에 없었던 화재였지만 그 화재 덕분에 저와 직원들, 회사는 더 강해졌습니다. 그 때 함께해준 직원들의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저는 명진을 더 탄탄하게 키워갈 생각입니다”
세계 1위 기업을 꿈꾸다
2012년, 명진화학은 인천 남동공단에서 지금의 검단공단으로 본사와 공장을 이전했다. 대지 7,000㎡, 건평 1만100여㎡의 규모에 31개 라인의 릴투릴설비가 깔렸다. 모든 공정은 최첨단이다. 도금액이 설비 안으로 흐르는 전 과정을 외부에서 모니터로 관리하는데, 불량이 생기면 모니터에 기록이 되고 자동으로 사이렌이 울리게 되므로 과거처럼 사람이 직접 도금작업을 진행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도금업체에서는 드물게 폐수재활용시스템을 갖추어 폐수의 70%를 재사용하고 있다. 사원복지를 위해 마련한 기숙사와 휘트니스센터 식당은 호텔수준으로 이름나 있다.
“도금공장으로 이렇게 큰 규모의 생산라인과 창고를 갖춘 곳은 저희 명진이 유일합니다. 공장을 지을 때 200평이나 되는 창고가 왜 필요하나고 많은 분들이 우려 했는데 지금은 그 200평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기숙사와 휘트니스센터 그리고 식당은 힘들때 함께 해 준 명진의 임직원들을 위한 선물입니다. 도금업은 일하기 가장 어려운 환경이라 인식돼 있습니다만, 개선하려한다면 충분히 바꾸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깨끗하고 건강한 환경에서 더 좋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위기는 남아있다. 2008년 설립한 개성공단의 공장이 가동 중단상태이기 때문이다. 개성공단에서는 1,300여명의 인력이 도금과 전자부품 임가공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결론 없이 중단 상태로 머물고 있어 공장운영에 대한 향후 일을 계획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정 대표는 급한 대로 한국에 설비를 갖추어 개성공단의 공정을 진행하고는 있지만 설비에 대한 이중 투자일 뿐 아니라 막대한 인건비를 감당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또한 또 한 번의 기회가 돼줄 것이라 생각하며 동남아 공장설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정 대표는 이제 명진화학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명진의 기술력이 입소문이 나면서 정밀도금을 의뢰해 오는 해외업체가 늘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직수출 비중이 높지는 않지만 전자부품업의 빠른 발전은 도금수요를 지속적으로 창출해 나갈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명진화학이 가진 창조적 도금과 자동생산라인, 환경오염방지의 세 가지 핵심기술은 세계 어디에서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세계무대에서 일본기업과 진검승부를 벌여보고 싶습니다”
도금에 미친 남자, 정을연 대표. 정 대표는 “과거에도, 지금도 언제나 경제적인 여건은 좋지 않다 말했고, 언제나 새로운 기술이 필요했으며, 언제나 단가 경쟁이 필요했다”면서 “주위 여건보다는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는 말로 대신했다.
한편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은 일흔 여덟번째 이달의 기능한국인으로 (주)명진화학 정을연 대표를 선정했다.
“과거가 아니라 지금 현재에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해야만 내가, 그리고 회사가 성장할 수 있으니, 당연히 내가 미쳐야 하고, 조직이 미쳐야 하며 회사가 미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지금 자신이 서있는 그 자리에서 한번 미쳐보십시오. 성공은 지금 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라고 힘주어 말하는 그의 향후 행보에 귀추가 모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