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 계통 포화로 인해 호남 지역 태양광 발전소들이 강제로 가동을 멈추는 ‘출력 제어’ 사태가 이어져 온 가운데, 철도망을 이용해 전력을 물리적으로 수송하는 이른바 ‘에너지 트레인’ 구상이 구체화됐다. 송전탑 건설에 10년 이상 소요되는 현실적 한계를 기존 철도 인프라로 돌파하겠다는 전략이다.
17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재생에너지 철도운송 기술개발 방안 토론회’에서 전용주 한국철도공사(코레일) 부장은 대용량 ESS(에너지저장장치)를 탑재한 화물열차를 이용해 호남의 잉여 전력을 수도권으로 나르는 구체적인 로드맵을 공개했다.
이날 전 부장은 “현재 전남·북 지역은 국내 재생에너지의 30~40%를 생산하지만, 송전망 접속 대기 물량만 4.2GW에 달한다”며 “반면 동해안-신가평 HVDC(초고압직류송전) 등 주요 송전망 건설은 주민 수용성 문제로 최대 150개월까지 지연되고 있어 기존 전력망으로는 해법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코레일이 제안한 해법은 ‘배터리 이송 방식’이다. 태양광 발전이 활발한 주간에 호남 지역 역(驛)에서 배터리 컨테이너를 충전하고, 전력 수요가 적은 야간에 화물열차로 수도권 인근 역까지 이동시킨 뒤, 다음 날 아침 수도권에 공급하는 모델이다.
전 부장은 “화물열차 1량에 20ft 규격의 배터리 컨테이너 2개를 적재할 수 있다”며 “컨테이너당 약 5MWh 용량을 가정할 때, 20량 1편성 운행 시 한 번에 약 200MWh의 대용량 전력을 나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4인 가구 약 2만 세대가 하루 동안 쓸 수 있는 전력량에 해당한다.
코레일은 구체적인 거점 역도 제시했다. 충전 거점으로는 전남의 장성화물역, 대불역, 덕양역과 전북의 새만금 인근(동산역, 남원역 등)이 꼽혔다. 이들 지역은 태양광 발전 단지와 인접해 있고, 화물 전용 측선이 있어 충전 설비 구축이 용이하다는 평가다.
특히 전 부장은 “새만금 지역은 2031년까지 7GW 규모의 재생에너지 생산이 예정된 만큼, 철도 운송의 최적지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수요 거점으로는 경기도 화성의 서화성역과 평택의 안중역이 지목됐다. 서해선 라인인 서화성역은 인근에 산업단지가 밀집해 있어 전력 수요가 높고, 유휴 부지가 넓어 대규모 방전 설비를 갖추기에 적합하다는 분석이다.
운송 경로는 전라선·호남선을 타고 올라와 장항선을 거쳐 서해선으로 진입하는 루트가 유력하다. 전 부장은 “병목 구간인 장항선의 선로 용량을 검토한 결과, 일일 왕복 14회 정도의 추가 운행이 가능해 물류 흐름에 지장 없이 전력 수송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해외에서는 이미 유사한 모델이 시도되고 있다. 미국의 스타트업 ‘선트레인(SunTrain)’은 송전망 연결이 어려운 지역의 재생에너지를 철도로 실어 나르는 사업을 추진 중이며, 현재 10,460km(6,500마일) 이상의 주행 실증을 마치고 2030년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전 부장은 “이 기술이 상용화돼 연간 1,022GWh의 전력을 수송한다면, 탄소 배출량을 연간 46만 톤가량 줄일 수 있다”며 “물동량 감소로 위기를 겪고 있는 철도 물류가 ‘에너지 물류’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해결해야 할 과제도 남았다. 수십 톤에 달하는 배터리 컨테이너의 안전성 확보, 충·방전 시 전력 계통에 미치는 영향 분석, 그리고 현행 전기사업법상 철도 사업자의 전력 판매·송전 허용 여부 등이다.
전 부장은 “에너지 스테이션 구축 방식과 차량의 팬터그래프(집전장치)를 이용한 직접 충전 기술 등을 연구 중”이라며 “기술 개발과 함께 제도적 뒷받침이 이뤄진다면 국가 전력망 효율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