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일보]
부처 간 칸막이를 허물고 기술탈취 대응 창구를 하나로 통합한 범정부 차원의 통합 구제 시스템이 가동되자 현장의 절박한 호소가 쇄도하고 있다. 올해 초 6개 부처가 모인 ‘중소기업 기술탈취 근절 범부처 대응단’이 출범하고 통합 신고 창구인 신문고가 문을 열자, 불과 한 달 만에 과거 1년 치에 육박하는 피해 신고가 쏟아진 것이다.
수면 아래 억눌려 있던 피해 기업들의 수요가 가시적으로 확인된 만큼, 정부는 지난 1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한국형 증거개시제도’의 현장 안착과 과징금 대폭 상향 등 실질적인 보호망 가동에 속도를 내고 있다.
생존 위협하는 기술탈취, ‘입증 포기’ 하는 이유
그동안 중소기업 현장에서 기술탈취는 기업의 존폐를 가르는 치명적인 위협이었으나, 정작 제대로 구제를 받는 경우는 드물었다. 정부 조사에 따르면, 중소기업의 기술탈취 피해 규모는 연간 약 300여 건에 달하며, 건당 평균 피해액은 18억 원 규모다.
그러나 피해 기업 중 43.8%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들이 대응을 포기한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입증의 어려움(73%)’이었다.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들여 소송으로 가더라도 손해배상 인용률은 청구액 대비 17.5%에 불과하며, 대응에 소요되는 평균 기간도 14.4개월로 길어 자금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은 버티기 힘든 실정이다. 여기에 부처별로 보호 법률과 지원 창구가 쪼개져 있어, 기업 입장에서는 어디에 수사나 행정 구제를 요청해야 할지 절차적 혼선마저 겪어왔다.
칸막이 허문 범정부 대응, ‘원스톱 신문고’ 등판
이러한 칸막이 행정의 병목을 해소하기 위해 지난 1월 중소벤처기업부·산업통상부·공정거래위원회·지식재산처·경찰청·국가정보원 등 6개 핵심 부처가 결집한 ‘중소기업 기술탈취 근절 범부처 대응단’이 출범했다.
대응단의 첫 번째 핵심 협업 성과는 바로 ‘창구 일원화’였다. 부처별로 흩어져 있던 지원 체계와 제도를 수요자가 편리하고 신속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기술보호 정책포털인 ‘중소기업 기술탈취 근절 신문고’를 지난 3월 정식 개설했다. 중소기업이 신문고에 신고하면, 법률 전문가 상담을 통해 최적의 대응 전략을 세워주고 사안에 적합한 조사·수사 기관으로 직접 연계해 주는 ‘원스톱 구제 체계’가 마련된 것이다.
한 달 만에 신고 쇄도… 기계·설비 등 ‘제조업’ 비중 압도적
통합 신문고의 파급력은 즉각적인 지표로 나타났다. 중기부에 따르면 출범 한 달여 만에 총 20건의 기술분쟁 신고가 접수됐으며, 이는 과거 연간 행정조사 신고 건수(2024년 20건, 2025년 16건)를 단 30여 일 만에 달성한 수치다.
중기부 확인 결과, 접수된 20건을 산업별로 분석하면 기계·설비·소재 관련이 8건으로 가장 많았고, 화학(4건), 정보통신(3건), 바이오·의료(2건) 등이 뒤를 이었다. 현재 조사·수사 기관에 배부가 완료된 8건의 경우, 중기부와 지재처, 경찰청 등으로 배부돼 기술침해(1건), 영업비밀 침해(4건)와 특허법 위반(3건) 등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진행 중이다.
기술탈취에 해당하지 않아 반려된 3건은 정보통신망법 위반이나 사기죄, 단순 계약 위반 등으로 확인됐다. 중기부는 향후 이러한 사례 데이터를 축적해 기술탈취 여부를 자가 진단할 수 있는 ‘자주 묻는 질문(FAQ)’ 가이드를 공개할 예정이다.
‘한국형 증거개시’ 안착과 강력한 징벌적 제재 가동
정부는 단기적인 행정 지원을 넘어, 가장 큰 허들인 "입증의 어려움"과 "솜방망이 처벌"을 해결하기 위해 근본적인 제도 개선에 나선다. 향후 신고자가 사건 처리 현황을 확인할 수 있도록 시스템 고도화를 추진하고 담당 인력도 조속히 늘릴 방침이다.
이와 함께 지난 1월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한국형 증거개시 제도’의 하위 법령 정비와 현장 안착에 속도를 낸다. 법원이 지정한 전문가가 직접 사건 당사자를 조사해 증거를 확보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 만큼, 정보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소송의 실효성을 높이는 데 주력한다.
제재 수위 역시 크게 강화된다. 중소기업 기술보호법 전부 개정을 통해 기존 시정‘권고’를 강제성 있는 시정‘명령’으로 격상하고, 벌점제를 도입해 상습 침해 기업의 공공 입찰 참여를 제한한다. 특히 악의적이고 중대한 기술탈취에 대해서는 기업 존립이 흔들릴 수 있는 '최대 50억 원의 과징금' 부과를 추진해 범죄 억지력을 높인다.
한성숙 중기부 장관은 현장의 높은 기대와 관심에 부응할 수 있도록 범부처 협력을 강화하고 기술 보호를 위한 예산도 확대해 나가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