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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닿지 못한 편지, 국경을 건넌 기억…최영 '국경선의 연인들'
김성수 기자|kss@kid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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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닿지 못한 편지, 국경을 건넌 기억…최영 '국경선의 연인들'

1990년 평양서 건네진 갈색 봉투, 1946년 서울의 약속으로 이어져

기사입력 2026-09-03 17:3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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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일보]
사람은 국경을 넘지 못해도 기억은 때때로 길을 찾아간다. 누군가의 서랍 속에 남은 편지로, 오래 품었던 사진 한 장으로, 잊지 못한 이름을 노래에 담는 방식으로 다시 돌아온다.

최영의 장편소설 '국경선의 연인들'은 그렇게 남겨진 기억에서 시작한다. 1990년 평양에서 성악가 윤지숙은 여서연에게 작은 갈색 봉투 하나를 건네받는다.

“대전에 있는 김종수 선생에게 좀 전해 주세요.”

설명은 길지 않았고 봉투도 가벼웠다. 그러나 작품 속 표현처럼 손에는 오래 남는 무게가 있었다. 봉투에는 여서연이 1946년 서울을 떠난 뒤 대전의 의사 김종수에게 끝내 보내지 못한 편지들이 담겨 있다.

'국경선의 연인들'은 1990년 평양과 1991년 서울을 거쳐 1946년 해방 직후 서울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작곡가 최민영은 자신이 만든 노래 ‘국경선의 연인들’을 윤지숙에게 들려준 일을 계기로 오랫동안 묻혀 있던 이야기를 마주한다. 서로 닿을 수 없는 곳에 선 두 사람이 한 사람의 이름을 잊지 못한 채 살아가는 노래다.

윤지숙이 꺼내놓은 것은 세월에 닳은 갈색 봉투였다. 봉투가 열리는 순간, 이미 지나간 줄 알았던 이야기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끝내 닿지 못한 편지, 국경을 건넌 기억…최영 '국경선의 연인들'
편지는 늦었지만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소설은 거대한 역사를 앞세우기보다 그 역사 때문에 멈춰버린 개인의 시간을 따라간다.

여서연과 김종수 사이에 놓인 것은 단순한 거리나 연인의 오해가 아니다. 해방 이후 급격하게 갈라진 한반도와 분단의 시간이 두 사람 사이에 들어선다. 시대는 앞으로 흘렀지만 두 사람에게 남은 어떤 시간은 그 자리에 멈춰 있다.

그래서 작품 속 편지는 단순한 서사 장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편지는 닿지 못했지만 사라지지도 않는다. 종이 위에 남은 문장들은 분단이 멈춰 세운 약속과, 그 약속을 품은 채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의 시간을 대신 증언한다.

최영은 여기에 노래와 사진, 호박 노리개를 더한다. 작품 속 사물들은 말이 없다. 대신 사람보다 오래 살아남아 기억을 운반한다.

특히 한복을 입은 여서연의 사진은 작품 후반부의 정서를 압축한다. 사진 속에는 연한 옥색 저고리와 짙은 자주색 치마, 그리고 허리 아래로 길게 내려온 호박 노리개가 담긴다. 그 사진은 한때 김종수의 양복 안주머니에 들어간 뒤 긴 시간을 지나 다시 윤지숙에게 돌아온다. 만나지 못한 두 사람 사이를 사진 한 장이 대신 이어온 듯하다.

호박 노리개 역시 장식품에 머물지 않는다. 오래된 햇살 같은 빛을 간직한 노리개는 지나간 시간을 눈앞에 붙잡아 두는 작은 표식처럼 등장한다. 편지가 언어의 기억이라면 사진과 노리개는 말하지 못한 기억에 가깝다.

실제 역사와 허구 사이의 ‘침묵’을 쓰다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상상을 함께 사용한다.

최영은 작가 후기에서 여서연이 실존 인물 여연구를 바탕으로 한 소설적 인물이라고 밝혔다. 김종수는 자료와 증언을 참고해 소설적으로 빚은 인물이며, 성악가 윤지숙과 화자 최민영 역시 이야기를 이끌기 위해 재구성한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작가는 후기에서 1990년 평양 범민족통일음악회와 1991년 서울 방문, 1993년 도쿄 음악회 등을 실제 사건의 배경으로 삼았다고 밝혔다. 다만 일부 이동 경로와 행사 장면, 인물의 대화와 심리, 편지 내용, ‘제비’와 ‘종’ 사이의 장면은 소설적 상상으로 채웠다.

이 구분은 중요하다. '국경선의 연인들'은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재현하려는 기록물이 아니다. 오히려 기록과 기록 사이에서 사라진 감정을 상상한다.

작가는 후기에서 “역사는 사실을 기록하지만, 소설은 사실과 사실 사이에 남겨진 침묵을 들여다본다”고 적었다. 이 문장은 작품을 읽는 하나의 열쇠가 된다.

역사의 연표에는 회담과 방문, 분단과 충돌이 기록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누가 누구를 기다렸는지, 어떤 편지를 쓰고도 부치지 못했는지, 사진 한 장을 왜 오래 간직했는지는 좀처럼 남지 않는다. 소설은 바로 그 빈 공간으로 들어간다.

분단을 한 사람의 이름으로 바라보다
몽양 여운형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흔적이 작품 곳곳에 놓여 있지만, 소설의 시선은 정치적 평가에 머무르지 않는다.

작가 역시 특정 이념이나 정치적 입장을 옹호하기 위한 작품이 아니라고 밝혔다. 대신 작품은 격동의 시대 속에서 흩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좇는다. 오늘의 시선으로 과거의 선택을 쉽게 재단하기보다, 당시 사람들이 감당해야 했던 시대의 무게와 한계를 함께 바라보려 한다.

제목 속 ‘국경선’은 남과 북을 나눈 경계이면서, 서로에게 갈 수 없었던 시간의 선으로도 읽힌다. 말하지 못한 감정과 돌이킬 수 없는 선택 사이에 그어진 선이기도 하다.

작품에서 분단은 체제와 이념이라는 거대한 단어보다 헤어진 연인, 전하지 못한 편지, 오래 간직한 사진이라는 개인의 언어로 다가온다. 작품은 이 개인의 언어를 통해 역사적 비극이 결국 사람의 삶과 관계에 남긴 상처였음을 비춘다.

한 장의 사진이 돌아온 자리
이 소설이 남기는 감정은 거창하지 않다. 오히려 조용하다.

누군가는 편지를 썼고, 누군가는 그 편지를 받지 못했다. 한 장의 사진은 누군가의 품에 오래 머물렀고, 시간이 흐른 뒤 처음의 기억이 놓였던 자리로 되돌아왔다. 그 사이 사람들은 늙었고 세상은 변했지만, 사진 속 인물은 여전히 그때의 얼굴을 하고 있다.

소설은 흘러간 역사와 멈춰 선 개인의 기억 사이의 시간차를 통해 분단이 남긴 상실을 비춘다. 새로운 시대가 열려도 만나지 못한 사람에게는 오래된 날짜 하나가 현재처럼 살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국경선의 연인들'은 전해지지 못한 편지와 되돌아온 사진을 따라가며, 분단이 결국 한 사람의 삶과 관계를 갈라놓는 일이었음을 환기한다. 역사적 사건의 빈틈에 남은 개인의 감정과 침묵을 소설의 언어로 더듬는 작품이다.

작가는 후기에서 국경이 사람을 갈라놓을 수는 있어도 기억까지 지울 수는 없다고 적었다. 이 소설은 끝내 만나지 못한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 출발해, 서로를 적이 아닌 이웃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는 조심스러운 평화의 소망으로 나아간다.

최영의 장편소설 '국경선의 연인들'은 퍼플에서 8월 25일 출간됐다. 172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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