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본보는 AI의 발전이 전시컨벤션 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에 대해 정형필 Kinexin(키넥신) CEO의 기고를 통해 살펴본다. 기고는 2차례에 걸쳐 게재될 예정이다.
Intentional Serendipity: 계획된 우연이 만들어 내는 혁신
전시컨벤션 산업이 가진 또 하나의 중요한 특성은 Intentional Serendipity, 즉 의도적으로 조성된 우연한 발견의 기회다.
전시회에 참가하는 기업과 방문객은 저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고객을 확보하거나, 공급업체를 발굴하거나, 기술 동향을 파악하거나, 투자 기회를 찾기 위해 행사장을 방문한다.
그러나 실제로 전시회에서 발생하는 중요한 성과 중 일부는 사전에 계획하지 않았던 만남에서 비롯된다.
우연히 방문한 부스에서 새로운 기술을 발견할 수 있고, 컨퍼런스의 질의응답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협력 가능성을 찾을 수도 있다.
전혀 다른 산업의 전문가와 나눈 짧은 대화가 새로운 사업모델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발견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주최자가 산업의 핵심 이해관계자들을 선별하고, 적절한 프로그램과 네트워킹 환경을 설계하며, 서로 다른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교류하도록 만든 결과다.
다시 말해 전시컨벤션 산업은 우연한 발견이 발생할 가능성을 체계적으로 높이는 산업이다.
AI는 기존 정보의 분석과 연결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지만, 물리적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인간관계의 형성, 암묵적 지식의 전달, 신뢰의 축적, 예기치 못한 대화의 전개를 모두 동일하게 재현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산업 현장에는 문서나 데이터로 충분히 표현되지 않는 지식이 존재한다.
실제 제품을 만져 보고, 시연 과정을 관찰하고, 기술개발자에게 즉석에서 질문하며, 다른 참가자의 반응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얻는 이해가 바로 그것이다.
이를 암묵지(Tacit Knowledge)의 교환이라는 관점에서도 해석할 수 있다.
AI가 이미 존재하는 지식에 대한 접근을 극대화한다면, 전시컨벤션은 새로운 지식과 관계가 탄생할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전시컨벤션 산업이 가진 중요한 차별성이다.
AI 시대의 역설: 디지털 지식이 넘칠수록 Physical Interaction의 가치가 커진다
AI가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더 많은 정보를 디지털 환경에서 습득하게 될 것이다.
기술자료를 검색하고, 시장을 분석하고, 경쟁기업을 비교하며, 심지어 가상의 전문가들과 토론하는 일까지 AI를 통해 수행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굳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 전시회와 컨퍼런스에 참석할 필요가 없을까?
나는 오히려 이 지점에서 새로운 기회가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보를 얻기 위한 단순한 방문은 줄어들 수 있다. 그러나 정보의 진위를 확인하고, 기술의 실체를 경험하며,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공동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만남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수 있다.
온라인에서 누구나 비슷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될수록, 현장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경험과 관계의 차별적 가치는 상대적으로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AI가 생성하는 콘텐츠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 사람들은 정보의 양보다 정보의 신뢰성과 맥락을 더욱 중요하게 평가하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산업 전문가들과 직접 만나 의견을 교환하고, 서로의 경험과 판단을 검증하는 물리적 상호작용(Physical Interaction)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다만 이것이 모든 전시회와 컨퍼런스의 성장을 자동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정보 전달이나 반복적인 상품 진열에 의존하는 행사는 AI와 디지털 플랫폼의 발전으로 오히려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다.
반대로 전문적 지식 교류, 현장 체험, 고부가가치 네트워킹, 신뢰 형성에 집중하는 행사는 새로운 경쟁력을 확보할 가능성이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전시회의 규모 자체가 아니라 참가자가 현장에서 얻는 지적·상업적 가치다.
전시컨벤션 산업은 거대한 산업별 평생교육 플랫폼으로 진화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전시컨벤션 산업에 새로운 역할을 요구한다.
지금까지 전시회가 주로 기업의 제품과 서비스를 소개하고 거래를 촉진하는 플랫폼이었다면, 앞으로는 산업별 지식의 생산과 공유, 전문인력의 재교육, 기술과 시장의 융합을 촉진하는 플랫폼으로 더욱 발전할 필요가 있다.
특히 기술의 변화 속도가 빨라질수록 기업과 전문인력은 지속적인 학습을 요구받게 된다.
한 번의 대학 교육이나 특정 자격만으로 평생의 전문성을 유지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때 산업별 전시회와 컨퍼런스는 새로운 형태의 평생교육(Lifelong Learning) 인프라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반도체 전시회는 최신 제조기술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AI 반도체, 에너지 효율, 글로벌 공급망, 지정학적 리스크, 기술인력 양성 등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교육의 장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의료기기 전시회 역시 의료기술뿐 아니라 AI 진단, 데이터 윤리, 보험제도, 규제, 의료서비스의 미래를 함께 논의할 수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에서는 산업 전문가와 연구자, 기업 경영자, 정책결정자가 서로의 지식을 공유한다.
AI는 참가자의 관심 분야를 분석하고, 맞춤형 교육 프로그램을 추천하며, 적절한 전문가와의 만남을 연결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행사 이후에도 AI 기반의 지식 플랫폼을 통해 토론과 학습, 비즈니스 협력을 지속할 수 있다.
결국 전시컨벤션 산업은 며칠간 개최되는 일회성 행사를 넘어, 연중 지속되는 산업별 지식 네트워크이자 학습 생태계로 발전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컨퍼런스 세션의 숫자를 늘리는 것과는 다르다.
전시회가 제공하는 핵심 가치 자체를 거래 중심에서 지식·교육·혁신·거래가 통합된 구조로 확장하는 것이다.
전시주최자와 전시장 운영자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
이러한 전환은 전시주최자뿐 아니라 전시장 운영자에게도 새로운 전략적 과제를 제시한다.
전시주최자는 단순한 행사 기획자에서 산업별 지식 생태계를 설계하는 큐레이터이자 연결자로 진화해야 한다.
산업의 핵심 의제를 발굴하고, 서로 다른 학문과 기술을 연결하며, 참가자 사이에서 의미 있는 만남이 발생하도록 설계해야 한다.
전시장 운영자 역시 단순히 전시 면적과 회의실을 제공하는 시설 공급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지식 교류와 교육, 네트워킹, 기술 시연, 공동연구, 투자 상담이 유기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이를 위해 AI 기반의 참가자 매칭, 전문 교육 프로그램, 하이브리드 지식 플랫폼, 실시간 번역, 데이터 기반의 행사 성과 분석 등 새로운 서비스가 중요해질 수 있다.
전시회가 끝난 뒤에도 참가자들이 지속적으로 연결되고, 산업별 커뮤니티가 성장하며, 새로운 프로젝트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는 참가자 데이터의 보호, 정보의 신뢰성, 운영비용과 투자수익률에 대한 현실적인 검토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전시컨벤션 산업은 공간 임대와 행사 운영을 넘어 산업 지식의 교류와 혁신을 지원하는 고부가가치 서비스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AI 시대, 전시컨벤션 산업의 새로운 존재 이유
AI가 인간의 지적 활동을 빠르게 보조하고 대체하는 시대일수록 인간은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 그리고 누구와 만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야 하는지를 더욱 깊이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깊은 전문성과 다학제적 사고, 언어적 정밀성, 비판적 판단 능력은 중요한 경쟁력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량은 책이나 디지털 정보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다른 분야의 전문가와 토론하고, 현장에서 기술과 제품을 경험하며, 서로 다른 관점과 충돌하고, 예상하지 못했던 기회를 발견하는 과정에서도 발전한다.
바로 이 지점에 전시컨벤션 산업의 미래가 있다.
전시회는 산업을 물리적으로 구현하고, 컨퍼런스는 그 산업이 축적한 지식을 교류하며, 사람들의 만남은 새로운 협력과 혁신의 가능성을 만들어 낸다.
AI는 이러한 과정을 대체하기보다는 더욱 정교하고 생산적으로 만드는 도구가 될 수 있다.
AI가 지식에 대한 접근을 민주화한다면, 전시컨벤션 산업은 그 지식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새로운 가치로 전환되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AI가 발전할수록 교육이 불필요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중요해질 수 있는 것처럼, 디지털 상호작용이 확대될수록 목적과 가치가 분명한 물리적 만남의 중요성 역시 새롭게 부각될 수 있다.
그것이 AI 시대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역설이다.
그리고 그 역설 속에서 전시컨벤션 산업은 단순한 산업의 홍보와 거래를 넘어, 인간의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을 활성화하고 산업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 가는 핵심 플랫폼으로 도약할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AI 시대에 전시컨벤션 산업이 던져야 할 질문은 더 이상 '사람들을 어떻게 많이 모을 것인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어떤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어떤 목적으로 연결하여, 그들이 함께 어떤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도록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야말로 앞으로 전시컨벤션 산업이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혁신의 방향일 것이다.
기고: 정형필(Phil Chung) 인도 뉴델리 국영전시장 야쇼부미(Yashobhoomi) 운영사(Kinexin Convention Management)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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